오 남매의 요람기 - 뱅골,
일곱 번째 이야기

by 권영순

같은 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기억하는 건 각자 다를 수 있다. 결국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내 입장과 관점일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위로 두 오빠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모른다. 대신 동생들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작은 오빠에 대한 엄마의 이야기 중 기억나는 건 두 가지다. 작은 오빠는 신동 소리도 들었지만 장난기도 많았던 모양이다. 우리 집은 동네에 하나뿐인 우물이 있었다. 모두 우리 집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가고 각종 먹거리 손질을 했으며 빨래도 했다. 엄마는 시집을 오면서부터 동네 아낙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우물에서 첫 물을 길어 부엌에 있는 항아리에 채우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밤새 솟아난 우물물을 어느 집 새댁이 가장 먼저 길어가는 가에 따라 며느리의 자질이 평가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남들이 먼저 물을 길어가는 것에 대한 질투심을 이렇게 미화시킬 수도 있다니? 지금이야 벽촌이라도 수도가 들어가니 다 아득한 옛날이야기지만.


그 우물가 아래 미나리꽝이 있었다. 우물에서 사용한 물들이 흘러내려가는 곳이라 항상 물이 고였다. 쓰고 흘려보낸 물이라 거의 구정물 수준이라는 게 함정이다. 미나리는 물이 많아야 잘 자란다. 우리 미나리꽝은 미나리를 기르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온 동네 사람이 쓰니 언제나 물이 흥건하게 차 있었다. 거의 진창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보니 작은 오빠가 미나리꽝에서 나오는 데 온몸에 진흙이 묻어 눈만 반짝이는 애가 있더란다. 미나리꽝에서 첨벙거리다 나온 작은 오빠의 몰골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작은 오빠를 우물에 데려가 물을 퍼붓고 씻겨 놓으니 어찌나 뽀얗고 귀엽던지 야단도 못 치셨다고 하시며 그때를 가끔 회상하셨다.


서울 동대문 밖 할머니(대규모 군수 공장을 하시던 할머니의 언니다) 집에서 작은 오빠가 없어져 난리가 난 일도 있다고 하셨다. 그 시절 아이들을 유괴하는 건 대부분 문둥이들이었다. 문둥병(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 속설 때문에 아이들을 유괴하는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속이 타서 동대문 주변을 뛰어다니며 작은 오빠를 찾아다니셨다. 땀이 흠뻑 젖을 정도가 될 즈음 신설동 쪽에서 아장거리며 오는 아이가 보여 뛰어가시니 작은 오빠였단다. 할머니가 ‘너 어디 갔다 오냐’고 화를 내시니 ‘저 쪽에서 살살 걸어왔지.’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더란다. 오래간만에 서울 언니네 집으로 나들이 왔다 손자를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간을 졸이며 속을 태우셨는지 할머니는 그때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무더운 여름이면 가끔 뱅골 집의 큰 대문에 그네를 걸어주셨다. 아마 할아버지가 걸어주셨던 것 같다. 아니면 머슴 아저씨 거나. 큰 대문은 바람이 드나드는 바람 길이었다. 말 그대로 시원한 바람이 항상 지나다녔다. 햇살이 쨍한 무더운 날은 그곳에 멍석을 깔고 그네를 타며 더위를 피했다. 대문을 지나 바깥마당 끝에는 작은 도랑이 있었다. 장마 때 집으로 물이 들어오는 걸 막는 용도였기에 평소 수량은 아주 적었다. 사랑채 옆에는 흙으로 쌓은 담벼락이 있었다. 나는 도랑 옆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넘어 남복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복이는 나보다 한 학년 어렸지만 그 시절 온갖 놀이를 함께하던 내 절친이었다.


그날도 남복이와 놀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담벼락을 타고 기어 다니는 커다란 능구렁이를 본 터라 얼마간 경계를 하며 혹시나 싶어 긴 막대기를 들고 걸었다. 문제는 그 막대기로 담벼락 여기저기를 툭툭치고 지나간 내 행동이었다. 어느 지점을 잘못 건드렸는지 말벌들이 날아와 나를 공격했다. 꽤 여러 군데를 쏘였다. 상당히 아팠다. 집에 무슨 상비약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벌에 쏘이면 장독대에 가 된장을 찍어 쏘인 부분에 바르는 게 긴급 처방이었다. 부풀어 올라 따가운 상처에 된장을 꺼내 덕지덕지 문질렀다. 너무 아파서였다.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다. 안방에 들어가 겨울에 입는 긴 옷을 찾아 입었다. 곡식을 타작할 때 쓰는 장대까지 꺼내 들고 다시 그 자리로 갔다. 양은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말벌 집을 장대로 마구 내리쳤다. 벌집이 땅바닥에 뒹굴자 벌들이 내 주변을 윙윙 거렸다. 저녁에 벌에 쏘여 퉁퉁 부은 내 모습을 본 식구들 표정이란!


우리 윗집에는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일제 강점기에 이어진 6.25 전쟁 뒤끝이라 우리 마을도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수두룩했다. 그 할머니는 성격이 꼬장꼬장하셨다. 내가 듣기로 아들 하나는 인민군에, 하나는 국군에 보냈단다. 인민군에 끌려간 아들은 어찌 됐는지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다만 국군으로 전쟁에 나가 전사한 아들의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분은 안뱅 골에 사는 내 초등학교 동기의 외할머니기도 하셨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그 집 근처 지나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도깨비불 비슷한 것이 반짝이며 그 집 주변을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나중에 과학을 배우면서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된다. 푸세 식 화장실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인 성분 때문인 걸. 공연히 겁만 먹었던 것이다. 그 할머니 집 앞에도 꽤 넓은 텃밭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무와 배추 장다리꽃이 활짝 핀 그 집 텃밭에서 한나절을 놀았다. 고무신을 벗어 벌을 잡으며. 윙윙거리는 꿀벌들을 잡아 엉덩이 부분을 빨면 달달한 꿀맛이 난다. 장다리꽃에 앉아 꿀을 빠는 벌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고무신으로 덮치고 잡아 빙빙 돌리면 벌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고무신을 패대기치면 벌이 완전히 기절한다.


내가 어려서 잘 몰랐던 건 다른 문제이었다. 장다리꽃들은 씨앗을 얻기 위해 일부러 키운다는 사실이다. 한나절 잘 놀고 집에 돌아와 저녁까지 먹은 뒤에 일이 생겼다. 윗집 할머니가 찾아와 내가 한 일을 고스란히 일러바치신 것이다. 텃밭이 쑥대밭이 된 일에 엄청 화가 나셔서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신 것 같다. 결국 아버지가 사죄를 하며 씨앗 값을 물어드리겠다고 해서야 소동은 막을 내렸다. 그 일로 종아리를 맞지는 않았다. 대신 대청마루에 있는 괘종시계 밑에서 두 팔을 들고 벌을 서야 했다. 그때 어찌나 팔이 아프던지.

지금 돌아보면 윗집 할머니는 자주 아프셨던 것 같다. 전쟁이 뱅골에 사는 집집마다 각종 비극을 낳은 건 확실하다. 그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떠안으셔야 했으니 오죽 힘들었겠는가? 다 키운 장정 아들 둘을 전쟁으로 순식간에 잃고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윗집 할머니는 자주 굿판을 벌이셨다. 나는 지금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그 집 마당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굿을 하는 상위에 올린 각종 음식 때문에 더 그랬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화려한 옷을 입고 칼춤을 추는 무당이 아니었다. 진달래꽃을 붙인 화전과 색깔 고운 무지개떡이었다. 먹음직한 상위의 음식들을 얻어먹기 위해 나중에는 친구 찬스까지 썼다. 그 할머니의 외손자에게 콕 찍어 진달래 화전을 얻어오게 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지만 그때는 나름 간절했다. 진달래꽃을 따서 올린 화전의 달달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 화전을 어디 가서 맛보랴. 윗집 할머니의 한과 서글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나도 그때는 철없는 아이였음에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에게 화전을 구해다 준 친구의 별명은 날다람쥐였다. 그 애는 항상 주머니 가득 무슨 열매를 넣고 다녔다. 아마 밤이나 도토리였을 것이다. 청요리 근처 태행산에 다람쥐를 잡기 위해 같이 놀러 간 적도 있다. 당시 태행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바위산이었다. 일제의 수탈 때문에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되었단다. 그 친구는 태행산에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다람쥐를 생포해 학교에 기증했다. 다람쥐라는 별명도 다람쥐보다 더 빠르다고 우리가 붙여주었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 다람쥐는 1층 교무실 앞에 설치된 다람쥐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물레방아 같은 바퀴를 돌리다 우리들이 주는 밤이나 도토리를 받아먹던 앙증맞은 다람쥐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 흔하게 보이는 청설모와는 다른 다람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쉽기만 하다.


셋째는 딱지와 구슬치기의 제왕이었다. 기막힌 솜씨로 동네 또래들의 딱지와 구슬을 긁어모았다. 딱지를 만들려면 제법 두꺼운 종이가 필요했다. 그 종이는 우리가 쓴 한자 공부용 일력 종이가 재활용되었다. 구슬은 돈을 주고 샀다. 당시 아이들은 용돈이 거의 없었다. 너나없이 가난한 시절이어서였다. 당연히 구슬 한 개도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네 또래들의 딱지와 구슬이 거의 셋째의 보물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건 가족들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네모 난 상자 안을 가득 채운 보물 상자는 창고 안에 보관했다. 어른들은 이런 셋째에게 놀라 혀를 차셨다. 아마 그 놀라운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기술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하셨다고 생각한다. 야단을 치지도 않으셨다. 나 역시 셋째가 하는 그 놀이 현장에 함께 있게 되면 응원 그 이상의 강한 성원을 보냈다.

명절에 가족과 방죽에서.jpg

명절이면 손주들은 할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배웠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강도 방죽을 스케이트로 매일 10킬로씩 오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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