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으로 말아 낸 사랑 이야기

영화 <말아>를 보고

by 권영순

서울 변두리 어디에나 있을 법한 김밥집 신나라. 그곳을 운영하는 엄마 영심과 팬데믹을 핑계로 백수로 살고 있는 딸 주리. 취업도 인생도 말아먹고 있는 듯한 딸에게 엄마 영심은 할머니의 와병을 핑계로 김밥 가게 운영을 떠맡긴다. 주리는 엄마에게 반항하면서도 김밥 가게 운영 노하우를 상세히 필기하고 집에서 실습까지 해가며 일을 맡는다.

거기에 골목 코너 코딱지만 한 김밥 집에 드나드는 훤칠한 취준생 이원. 하필 이원은 김밥의 필수 재료 단무지에 알레르기가 있는 남자다. 그런 세 사람의 하모니를 엮어 썰어놓은 김밥 단면에 드러나는 오색 색감처럼 맛깔나게 담아낸 영화였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서 삶과 사랑에 용기가 필요한 젊은 세대에게 추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보는 내내 섬찟한 트릭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이나 화려한 액션에서 보이는 폭력성. 바보 같은 연기로 웃음을 자아내 그걸 보고 웃은 나를 민망하게 만드는 장면이 없었다. 어찌 보면 밋밋해 보여도 지루하지 않게 영화가 흘러간다고 생각한 이유는 뭘까? 동행한 영화광 친구의 평처럼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와 스토리가 좋아서다. 잔잔하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끔 공감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엷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영화. 한 마디로 관객이 부담스럽지 않은 영화였다고나 할까?

서울국제음식영화제 표지. 우리 일행은 이 행사에서 제공하는 영화를 관람했다.
홍대거리에 있는 kt&g 상상마당 건물. 외관이 눈에 확 들어온다


김밥집 단골인 이원 덕에 주리는 인생 대 반전을 맞는다. 백수에서 삶을 스스로 조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기 주도적인 사람(나도 모르게 이 단어를 썼다)으로. 주리와 이원을 잇는 연애의 과정도 자연스러웠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로 엮어서다. 토익 시험 시간에 늦는다거나 단체 김밥 주문으로 북한산을 등반해 배달해야 하는 일 정도다. 서로 관심을 확인하는 대사도 담백하다.

- 우리 정상에 올라가 볼래요? -

정상을 함께 올라가 산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관계의 정립을 은근히 보여준다.


깨워야 할 연애 세포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나이가 된 내 입장에서 가끔 목불인견으로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과한 애정 표현이나 민망하게 남발하는 언어들이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학생들 교외 생활지도(전직 교사들의 나쁜 습관이라는 건 나도 안다)를 나온 것도 아닌데 한 마디 질책을 하고 싶을 만한 상황 설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아주 소소한 사랑이야기로 전달받았다.


한 사람의 성장 과정 속에는 가족도 추억도 존재한다. 어린 시절 그린 그림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설정도 좋았다. 가족의 과거와 현재, 무엇보다 주리의 어린 시절 추억 장면들이 스케치처럼 펼쳐질 때는 감독의 연출력이 세심하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섬세한 배열은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요즘 읽고 있는 책 <불편한 편의점>처럼 마음에 온기가 올라와서다. 덕분에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주리가 백수생활을 접으려 마음먹고 입사지원을 했을 때 각종 시험 성적이나 졸업장 등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장면을 보며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구나 싶어 젊은 감독답다는 생각도 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장사를 접어야 하는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은연중 보여준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사업(?)인 엄마의 김밥집 운영에 합류한 주리가 요즘 젊은이답게 오토바이로 전단지를 붙이고 홈페이지를 만드는 에피소드도 세심한 노력으로 보였다. 오래된 맛집이나 가게를 이어받아 젊은 감각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현실에서 가끔 목격하는 나로서는 그게 결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전단지 장면에서 심 달기 배우의 오토바이 운전 솜씨가 영화를 찍으며 일취월장했구나 싶어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서류 몇 장과 업무 능력과 무관한 질문을 던져 판단당하는 걸 거부하고 용기를 낸 주리에게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인상적으로 본 건 주리가 혼자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장면들이다. 젊음은 불안정한 앞날과 싸워야 하는 시기다. 그런 장면들에서 의외로 내면이 안정되고 단단히 성숙한 주인공을 엿보았다.

관객 질문에 답변하는 곽민승 감독과 심달기 우효원 배우 .

이 영화를 본 홍대 근처 kt&g 상상마당은 내가 사는 송파에서 제법 거리가 먼 곳인 데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다. 작은 아들은 촬영감독으로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상수역 1번 출구에서 친구들을 만나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에 갔다.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아주 훤칠한 감독님이 반갑게 맞으시며 표를 건네주셨다. 너무 훤칠해서 배우 하시다 감독(아직 내게 감독이라면 빵모자에 수염 정도는 길러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정관념이 있다)을 하시나?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맛있는 토크를 보았다. 정말 놀란 건 주리 역의 심 달기 배우와 이원 역의 우효원 배우의 페이스였다. 화면에서는 제법 얼굴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완벽한 마스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 촬영을 잘못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영화가 진행되면서 얼굴 표정도 옷차림도 갈수록 멀끔하고 단정해지는 걸 보고 다 감독의 철저한 연출이었구나 싶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동행해 준 40년 지기 친구들. 가수 우효 엄마인 정규숙 샘은 문체부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미국과 스페인에서 제법 오래 해외 체류를 했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오시면 나와 이지희 샘을 찾으셨다. 두 분 다 동료로 만났지만 성향도 마음도 잘 맞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윤재상 독립영화감독의 어머니 이지희 샘은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신다. 어릴 때부터 엉뚱하고 재기 발랄했던 윤재상 감독이 연극영화과를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보다 더 맞는 과가 없다고 말했었다. 언젠가 대단한 영화가 나올 것을 기대하는 이유다.


<말아>에서 보여준 소소한 사랑 이야기가 내 주변 젊은이들에게도 자주 생겨나고 해피엔딩이 되면 좋겠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죽음을 딛고 환하게 웃던 주인공들과 엄마 영심의 줌마 댄스 모습처럼.

결국 사람들 마음속에는 주변 누구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바란다. 이야기 속에서는 더 그런 모습을 기대하는 게 속마음이다. 폭력이나 가학성도 때로 현실 반영 측면에서 사람들의 반성과 변화를 끌어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간만에 친구들과 본 영화가 행복한 웃음들로 마무리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영화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곽민승 감독이 다음에도 오래 사람들의 기억 속에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영화를 보여주실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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