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호와 백양사에서 가을을 걷다

2. 백양산 백양사와 쌍계루 약사암

by 권영순

장성댐을 출발. 노란 꽃 축제 중이라는 가이드 필드로님의 설명을 들으며 백양사로 향했다. 백양산 백양사를 나는 오래전 대학시절에 와 본 적이 있다. 계산해 보니 40년도 더 전 일이다. 내장사 붉은 단풍의 추억만큼 강렬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기억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 쌍계루를 올라가 물에 비친 반영을 보는 데도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각에 절경을 찬양한 시문들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장성호 수변길에서 짧은 뱁새 다리로 황새들을 쫓아 가 본 터라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았을 때 서둘러 약사암을 다녀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필드로님에게 백양사 경내와 쌍계루를 찬찬히 둘러보고 그 앞 카페에서 연잎차를 마시며 한가와 여유를 즐기는 방법도 안내받았다. 그걸 포기한 이유는? 어느새 설핏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 탓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쌍계루. 물에 비친 누각 물그림자가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장성호 수변길처럼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약사암을 일행들보다 서둘러 올라가기로 했다. 백양사도 들르지 않고 약사암 입구로 직진했다.

약사암 입구 표지판

서둘렀다. 입구에서 약사암까지 거리는 0.4킬로. 영천굴에 가서 무병장수 약수를 마시는 것까지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백양사 입구에서 쌍계루를 휘익 둘러보고 올라오는 데만도 이미 30분이 지났다. 약사암까지 다녀올 시간은 넉넉하다고 하셨지만 마음이 바빴다. 등산길 오르막 100미터가 심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얼마나 먼 거리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약사암 입구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계단을 몇 개나 올라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사암에서 내려다보는 백양사 전경의 멋진 풍광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언제 이 먼 곳을 다시 와 보리' 싶었다.

결단은 빠르게! 주어진 시간에 약사암 왕복 미션 완수를 위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계단이 많다는 소리를 미리 듣기는 했다.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뒤따라 오는 누군가 계단이 200개 정도라고 해서 올라가며 세어 보다 곧 포기했다. 계단을 셀 여력도 없었다. 400미터가 4킬로처럼 느껴졌다. 이미 장성호 수변길에서 체력을 있는 대로 쓴 탓일 수도 있다. 물론 나날이 저질 체력이 되어가는 이유는 나이 탓이겠지만.

지난여름 은토끼님이 다리를 다치셔서 병가를 내시는 바람에 아침저녁으로 박물관 주변에 사는 냥이들 7마리의 밥을 먹이러 다녔다. 땀범벅이 되며 하루 일만 보 이상 나도 모르는 사이 파워 워킹 연습을 하게 되었다. 고양이들이 밥자리에 없으면 주변을 부지런히 오가며 찾아다녔다. 그런 걷기 연습 덕에 이런 하드 한 일정도 버티는 것이리라.

그래도 힘들었다. 더 올라가는 걸 포기할까 싶은 순간. 아직 녹음이 울울한 나무들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약사암이 있다! 힘을 냈다.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약사암. 소박하고 작은 절집이었다.
약사암을 지키듯 둘러싼 바위. 위풍이 당당해 보였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게 펼쳐진 백양산 능선
약사암에서 내려다 본 백양사 전경. 산그늘 탓에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약사암에서 내려와 백양사 경내를 잠시 둘러봤다.

무병장수 영천암 약수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무병장수를 포기하기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산할 때 가장 염려가 되는 건 낙상 사고. 마음속으로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무병장수 약수를 포기하기로.

이미 체력을 소진한 터라 조심조심 내려왔다. 무사히 내려오니 마음이 놓였다. 천근이 된 다리를 끌고 숙제를 마치듯 백양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보통의 절집과 비슷해 보인다. 다만 경내 입구 사천왕상의 먼지가 뿌옇게 앉은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가끔 목욕이라도 시켜드리지??? 절집 수문장 일만 부려먹는 건 아닌지??? 하긴 백양사 입구에 있는 흰색 양(백양)도 뽀얗지는 않았었다.

쌍계루를 지나가며 시간이 없어 먹어보지 못한 연잎차를 아쉬워했다. 그래도 약사암을 포기하지 않은 게 어딘가!

각종 꽃들로 가꿔진 황룡상 강변을 버스 안에서 보았다. 물론 아쉽지는 않았다. 더 움직이기 싫을 정도로 지쳐 있어서다.

장성을 보호하는 황룡의 보살핌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은 가을 축제일까? 축제가 한창 진행 중이라는데 평일이라서인지 인적이 드물다.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꽃들의 자태만 멀리 가까이 스쳐간다.

오후 5시. 밤을 준비하는 시간.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이 한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데다 종일 걸어 다녔으니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는 않았다. 대신 버스 안에서 한가와 여유를 즐기며 시시각각 바뀌는 하늘빛과 낙조를 구경했다.

조카딸이 제주 서쪽 한림에 살 때다. 학교를 퇴직하고 오늘 동행한 선생님과 제주를 자주 같이 오갔다. 저녁이면 산책 삼아 금릉과 협재해변, 한림항 방파제로 일몰을 보러 나갔다. 비양도 쪽 바다로 사라지는 해를 끝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비록 절정의 단풍을 보지는 못했어도 충만한 만족감이 든 하루였다.

밤 10시가 다 되어 공원에 도착. 박물관 주변에서 냥이들을 불러봤다. 종일 먹이를 기다린 티가 역력한 녀석들이 냥냥거리며 뛰어나온다. 인적이 끊긴 공원의 적막함과 밤의 한기를 냥이들의 온기로 채우며 종일 가방에 끌고 다닌 캔과 간식들을 꺼내 먹였다.

하루 3만 보 가까이 걷는 일정이었지만 올가을 최고의 날이었다고 나를 토닥이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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