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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Dec 22. 2022

어쩌다 고양이 돌보미

 눈이 내린다. 펑펑! 탐스러운 송이들이 내려서 쌓인다. 집안에서 보기만 할 수 있을 때는 제법 운치가 있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머리에서는 어린 시절 눈 오는 날 불렀던 동요가 떠오른다.

  새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눈 내린 산길에 구두 발자국

 눈 내린 산길을 바둑이와 함께 떠나가는 그 누군가를 상상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는 눈과 비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춘기 때 비 오는 날이면 그 시절을 보냈던 제기동 집 주택가를 일부러 걸어 다닐 정도였다.

  눈도 좋아했다. 눈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는 여유. 그건 지금도 로망이다.

눈 내리는 조각공원

  오늘은 펑펑 내리는 눈을 집에서 구경할 여유가 없다. 대충 가족들이 일터로 갔으니 집안일을 마치고 화곡동으로 가야 한다. 벌써 7일 째다. 원래는 하루 건너 자고 올 생각이었다. 혼자 긴 시간을 보내는 나리 녀석이 안 되어서다. 하지만 잠자리가 바뀐 내 몸이 적응을 못한다. 지난번 온천에서의 일박이 실패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냥 매일 오가기로 했다.

 입양을 잘못 시켰나? 의구심이 살짝 든다. 나리는 입양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문제는 너무 오래 공원 생활을 해 사람들에게 쉽게 엉기지 않는다는 거다. 누가 만져도 경계하지 않는 녀석들도 꽤 있다. 하지만 나리는 그런 호락호락한 개냥이가 아니다. 오죽하면 동물 병원 의사 선생님이 입양을 다 말렸을까.

캣타워에 올라가 이렇게 내려다볼 때마다 제 엄마 아롱이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일본 가던 첫날 녀석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이동장까지 들고 갔다. 하지만 몇 번 녀석에게 앞발로 얻어맞고 포기. 절대 자기를 데려가지 못한다는 고집만 읽었을 뿐이다.

  이게 출퇴근을 하게 된 이유다. 고양이 돌보미로. 거기다 매일 새로운 간식을 싸 들고.

멀리 수비라치의 하늘 기둥이 보인다

집을 나선다. 가우디 성당을 이어서 건축한 수비라치의 작품 하늘 기둥이 멀리 보인다. 혹 미끄러질까 봐 조심하며 그 옆을 지나간다.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가서 가이드가 보여준 이 사진을 봤을 때 놀라면서도 행복했다. 나는 그 앞을 수시로 지나다닌다. 입장료도 없다.

박물관 높은 담벼락 그 위에 아롱이와 사랑이가 지낸다. 여름밤 사랑이를 찾으러 가면 아찔한 높이의 담 꼭대기를 달려와 나를 여러 번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롱이와 사랑이가 있는 곳은 제법 경사가 있는 언덕이다. 지난여름 다리를 다치셨던 은토끼님이 행여눈길에 넘어지실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오늘은 공원 냥이들에게 다녀갈 시간이 부족하다. 화곡동에서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낙상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동행하는 부부의 모습이 눈 속에서도 정겹다

 눈이 내려 쌓이는 공원은 평소와 달리 살짝 고요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시는 분들과 걷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눈 때문인지 냥이들도 안 보인다. 평소 이 시간이면 밥 먹으러 나오는 녀석들이 여기저기 급식터에 꽤 있다.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도 불꽃 이미지가 변함이 없다

  눈길이 미끄러우니 얼른 공원을 벗어나야겠다며 전철역쪽으로 향하다 나도 모르게 발길을 틀었다. 평소 눈 내리던 날이면 아예 낙상 방지 차원에서 집을 나서지 않아 이런 풍경이 공원에 펼쳐져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눈이 내리는 공원 풍경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설경 구경을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자꾸 사진을 찍게 된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곳곳에서 내 발자국 소리가 뽀드득거린다.

 어린 시절 듣던 소리같이 맑고 청아하다.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온다. 순수한 즐거움의 게이지가 확 올라간다. 이것도 나리 덕인가? 녀석이 아니었으면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집을 나설 일이 거의 없었을 터.

사람 발자국 대신 여기저기 냥이 발자국(?)이다.

 숲길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밟지 않은 곳은 눈이 쌓였어도 미끄러지지 않는다. 혹시 넘어지더라도 최대한 부드럽게 넘어지면 낙엽 위라 괜찮을 듯싶어 용기를 냈다. 잘한 결정이다.

 그렇게 들어서니 사람 발자국 대신 동물 발자국이 보인다. 숲길 밥자리에 들렀을 어떤 녀석의 발자국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선명하다.

누군가 숲길에 설치해 둔 밥자리로 향한 냥이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공원에서 사진을 몇 장 건졌다. 눈이 내려 쌓이는 풍경들이다. 역으로 들어서며 푹푹 빠져 걸을 때마다 신발에 올라 붙던 눈을 털어야 했다.

공원 역 앞에 전시된 엄지 척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전철을 한 번 더 갈아타고 까치산 역에 도착하니 눈 풍경이 거의 없다. 한 시간도 안 돼 타임 슬립한 기분이 다 든다. 그 사이 눈이 다 녹아 질척거린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 심지어 내릴 때는 눈이었는데 낙수가 되어 흘러내린다.


  그래도 행여 미끄러운 곳이 있을까 천천히 조심해 걷는다. 전철역에서 10여 분 이상 걸어야 아들과 나리가 함께 사는 조그만 투룸이 나온다.

  나리야! 부르며 들어가니 밤새 기다렸을 나리가 밥그릇 앞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냥냥거리며 말도 건다. 명백한 비난이 쏟아지는 기분이 다 든다.


  아들이 일본에 간 처음 이틀 간은 나리에게 본가로 가자고 난리를 부렸다.  안쓰러웠다. 혼자 긴 시간을 보내느니 본가로 와 오빠 까미(아롱이 아들로 나리의 친오빠다)랑 안면도 제대로 익히고 넓은 데서 뛰어다니기도 하면 내가 맛있는 것도 수시로 챙겨줄 텐데. 나리를 데려오려고 작은 아들이 독립하기 전 사용하던 방청소를 하고 심지어 전기 매트도 새로 마련했다. 있는 전기 매트를 너무 오래 써 혹시 전자파가 나올까봐.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밤을 혼자 보내야 할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요지부동! 눈만 껌뻑이다 내가 이동장을 들고 틈을 좀 볼라치면 어느새 애들 말로 쌩을 깐다. 속으로 저게 누굴 닮아 성격이 저렇게 까칠한가 싶다. 누구겠나? 제 엄마 아롱이지. 밥 먹인 지 4년이 넘어가니 아롱이 등을 몇 초간 쓰다듬을 수 있다. 하도 할퀴어서 아직도 내 가방에는 후시딘이 상비품이다.  

 아롱이는 박물관 주변을 강아지처럼 나를 따라다녀도 자기를 만지는 건 아직도 노우다. 그 엄마에 그 딸이다. 자기주장이 너무 확실하다. 나리를 데려오는 걸 포기하고 눈이 오나 날이 추워도 화곡동을 드나들며 고양이 돌보미를 하게 되었다.

 근데 까미는?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닌가? 잠시 의문이 생긴다. 까미는 식구들 누가 만져도 오케이다. 안겨 다닐 때 표정은 안정감과 행복감 만땅처럼 보인다.

태연하게 남편에게 안겨 다니는 까미. 가족들은 누가 안거나 쓰다듬어도 오케이다.

  눈이 내린다기에 살짝 긴장하고 집을 나섰는데 오길 잘한 것 같다. 오래간만에 공원의 색다른 풍경도 보고 나리에게 밥도 먹이고 놀아도 주고. 어찌 됐던 이틀이 지나면 나리 녀석도 알게 되겠지. 집사가 바뀐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돌아오는 길 잔디 광장 여기저기 눈사람이 생겼다.
올해 큰 아들이 사 준 책. 이 중에 하얼빈 읽기가 가장 힘들었다.

 작은 아들이 사는 화곡동을 오가며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큰아들이 사 준 김훈 소설 <하얼빈>은 읽기가 힘들었다. 사실 <남한산성> 못지않았다. 고구마를 삼키다 목에 걸려 있는 것처럼 힘들었다. 상상이 너무 사실처럼 잘 그려져서다.

 읽다 미뤄 둔 책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완독 할 수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을 오가며 내가 얻는 것들이 돌아보면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연말을 이렇게 보내면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어, 나를 기다리는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있어 행복하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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