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순 Dec 31. 2022

 남매들의 망년회

 나는 분위기를 좀 찾는 편이다. 특히 전망 좋은 카페를 좋아한다. 제주에 사는 조카딸은 이런 내 성향을 잘 알아 바닷가나 곶자왈에 있는 전망이 좋은 카페 정보를 내게 알려줄 정도다. 오죽하면 '카페녀'라는 별명이 다 있을까. 커피 맛을 1도 모르는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뻔하다. 그곳에서 보는 풍경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런 내가 분위기와 관계없이 빠지지 않고 가는 모임이 있다. 바로 오 남매 모임이다. 오가는 대화도 일상을 나누는 보통 남매들과는 좀 다르다. 서로의 안부를 조금 묻고 나면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망년회로 모인 청요리 들판은 겨울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장을 할 때만 해도 물이 잘 나왔는데 수시로 얼어붙는단다. 겨울 청요리 거주의 가장 큰 걱정이 물이다.

 우리 오 남매는 막내만 세 살, 나머지는 모두 두 살 터울이다. 오 남매가 한참 학교를 다니던 시절, 부모님은 우리 학비 마련을 위해 거의 시장에서 숙식을 해결하시며 장사를 하셨다. 우리는 부모님을 도와 너나없이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나는 가사로, 4형제는 밀린 배달 등으로 하교 후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래도 지금처럼 학원으로 돌지 않으니 저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관리 감시(?)할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았다.

행동에 제약이 없었던 덕분에 오 남매가 모여 부모님 모르는 일탈의 시간(?)을 보낸 적이 많다.

 

 화성 구포리에 살 때는 모두 밖으로 나가 놀았다. 연날리기, 자치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썰매 타기 등 남자애들의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여자였던 나는 고무줄놀이와 널뛰기를 자주 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 방패연과 썰매를 만들어 손주들에게 안겨주셨다. 방패연은 대나무를 직접 쪼개 붙이시고 근사한 태극무늬까지 그려 넣은 것이었다. 솜씨가 워낙 좋으셨다. 구포리에서 할아버지에게 그런 연과 썰매를 받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연은 바람만 잘 타면 어린 우리들 마음까지 높이높이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내 기억에 썰매 타기와 연날리기는 특히 셋째가 좋아했다. 그 추억 때문인지 셋째는 아직도 겨울이면 연을 날린다. 오 남매 중 각종 잡기에 능해 어린 시절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등으로 불린 재산이 만만치 않아 가족들을 놀라게 하더니….

  망년회날 연을 날리는 셋째.

 제기동에 살 때 우리들은 틈만 나면 만화책을 빌려다 돌려보고 화투나 오목 등 가벼운 게임을 자주 했다. 물주는 큰오빠가 심부름은 막내가 하는 식이었다. 다섯이 모여하는 놀이이니 항상 집안이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권가네 이야기>를 쓰며 만화책 빌려다 보기를 통해 얻은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속독 훈련과 세계 명작 요약본을 만화로 읽게 되었다고. 거기다 산더미로 쌓인 만화책을 다섯 중 한 명이라도 늦게 보면 돌아오는 핀잔이 장난 아니었으니 집중력 또한 저절로 길러졌을 것이다. 만화책을 다독하면서 저절로 쌓은 다양한 훈련은 오 남매 모두에게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적이 직선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가벼운 놀이는 점차 발전했다. 대학원을 다니던 큰오빠는 매주 정기적으로 형제들에게 <논어> 강좌까지 열었다. 그 강좌는 기간도 길었고 우리들의 호응도도 높았다. 왜였을까? 입을 열어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맞는 말이다. 거기에는 언론 통제(당시는 유신 치하였음)가 전혀 없었다. 큰오빠가 한 일은 논어에서 골라온 문장을 읽고 해석과 각주를 좀 달았을 뿐이다. 주제만 던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끝나는 시간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문장에 대해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했다. 무슨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 최근 지식이나 정보 등을 활용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당히 하는 식이었다. 물론 차례는 지켰다. 각자 전공이 다른 오 남매(순서대로: 유학, 섬유공학, 국문학, 계산통계학, 동양사학)가 모여했던 그 공부는 다소 어설픈 구석이 있었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를 좁혀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남매들은 왜 나이가 들수록 더 다툴까? 어린 시절 알새 모를 새 서로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며 다투는 일이 주변에 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모님의 편애나 성격상의 문제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자란 어린 시절이 없었다.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딸인 나에 대해 편애를 하면 했지 적어도 차별은 하지 않으셨다.


 남매들만의 시간을 자주 가진 덕분에 우리는 서로 입장을 쉽게 이해한다. 당시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았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우애라고나 할까? 나는 그런 관계를 만든 건 큰오빠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중심 사회에서 장남의 역할을 위해 무한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를 함께 하던 습관은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지금도 모이기만 하면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간다. 지난 추석의 주제는 우리나라 70대 노인 문제. 우리나라 의무교육이 시작된 해가 1959년이라는 것도 여기서 들었다. 오늘날 우리 경제를 일으켜 세운 세대로서 받을 수 있는 대우가 너무 빈약하다는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나왔다. 한 시간가량 천안 공원 묘원 게이트 하우스 야외 테이블에서 나눈 이야기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도 거기에서 오간 정도만이라도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 문제에 걱정을 하고 해결책 마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불판에서 구워지는 키조개

 막내 동생과 청요리에 도착했을 때, 셋째는 사강 시장에서 구해 온 키조개와 조개 그리고 양념 갈비를 숯불을 피우고 불판에 올려 굽고 있었다. 내가 들고 간 노가리를 꺼내 같이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이날 이야기는 최근 읽은 책.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 작은 오빠가 최근 구입한 책이 <작은 땅의 야수>란다. 나는 김훈의 <하얼빈>과 <남한산성> 이야기를 한 다음 최근 읽은 <의사들에게 살해되지 않는 47가지 방법>이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가 드니 건강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진다면서.

몇 달 동안 기다려 간신히 빌려왔다. 생각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햇살이 좋았는 데도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키조개를 넣어 끓인 작은 오빠의 특제 요리

 수십 년간 낚시질을 다니며 익힌 작은 오빠의 요리가 나온다. 일단 맛은 보장이다. 여름에 갯바위 낚시를 갔다 태풍으로 고립돼 말썽이 생긴 적도 제법 있지만 낚시만큼 요리도 일품이다. 가끔 남자 요리사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은 맛이다. 야외에서 요리는 남자가 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소신도 있다.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어서인지 불판에 모여 따끈한 국물을 떠먹어도 한기가 들었다.

마무리 떡국. 다들 배가 부른 데도 한 그릇씩 먹었다.

 한기를 못 견딘 내가 대강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청했다. 청요리로 출발하기 전 일찍 공원 냥냥이들 밥을 주러 갔을 때도 손이 시려 가져간 캔을 따고 닭가슴살 봉지를 뜯는 게 힘들었었다. 추위에 야옹거리며 밥을 보채고 따라다니는 냥냥이들 탓에 마음을 졸여서인지 그 피로가 쌓인 탓도 있었다.

화목 난로에 불을 피우고 가래떡을 구웠다.
배가 불러도 갈치포 구이, 노가리 등이 꾸역꾸역 들어간다.

 태행산 자락 인근이라 화목 난로에 넣을 장작을 구하는 건 쉽단다. 막내가 눈치를 보더니 구루마를 끌고 인근 야산으로 가 장작을 한 짐 해 온다. 전직 노동부 공무원이지만 육체노동은 젬병이다. 어찌나 힘들다고 툴툴거리던지. 게다가 왜 노동의 정의를 육체노동으로 한정하는지 그건 잘못이라며 정의를 바꾸어야 한단다. 노동부에 있을 때 정착을 시키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장작을 넣으니 금방 주변이 훈훈해졌다. 노가리, 갈치포에 귤까지 구워가며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망년회가 뭐 별 건가? 


 돌아가신 부모님이 바라시던 건 오 남매가 서로 도우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이름만 망년회로 붙였지 그냥 모여서 밀린 수다도 떨고 한 나절을 보내다 온 거나 마찬가지다. 그곳에 상주하는 작은 오빠는 돌아오는 나와 막내에게 매주 토요일 그냥 와서 놀다 가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김치 냉장고에 신문지로 잘 싸 저장해 놓았던 배추를 한 포기 꺼내 건네며 말이다.

작은 오빠 성격은 꼼꼼하다. 옆에서 얻은 배추를 한 포기씩 신문지에 싸고 다시 비닐에 싸 보관했다 꺼내 나에게 들려 보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내 차를 과천역에서 내려 전철을 탔다. 연일 거듭되는 강추위로 몸은 힘들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남매들의 모임이 자주 필요하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주에 있어 참석하지 못한 큰오빠의 아쉬워하는 얼굴이 떠오르며 말이다. 남매 모임의 주최자가 건강 문제로 자주 오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 년에 대여섯 번 모이지만 우리들 남은 시간을 따져보면 정말 얼마 되지 않을 터. 통이 크지 않은 배추 무게도 만만치 않게 느끼며 배추를 든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고양이 돌보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