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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Mar 29. 2023

고사리 장마 때 제주를 오다

 제주에 오는 날부터 비가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를 맞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옷이 젖었다. 꾸물거리는 날씨에 날이 으스스해서 잘못하면 감기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시기 일주일을 제주에서는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는 것을. 땅에 갇혀 있던 고사리들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하는 시기라는 의미일까? 물론 '고사리 장마'를 알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는 육지 사람인데.


 제주에 오기 전 서울 날씨는 3월에 4월 중순 날씨처럼 헷갈리게 따뜻했다. 각종 겨울옷을 당장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공원에 가면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남쪽 제주는 더 따뜻할 거라고 예상했다. 반팔과 얇은 옷들 위주로 짐을 꾸렸다. 와 보니 추웠다.


 제주 공항에 내렸을 때 비가 오락가락했다. 아주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는 바람의 섬! 그걸 잊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랑과 연분홍이 넘실거리는 제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주는 연분홍 노랑이 넘쳐흘렀다.


 작년 3월 아픈 친구가 있어 다녀간 뒤 근 일 년을 제주에 발을 들이지 않았었다. 퇴직을 하고 툭하면 제주를 오갔었는데 지난 일 년은 삶에 뚜렷한 목적도 없이 나름 방황 아닌 방황을 한 시기였던 모양이다. 수십 년 다니던 직장을 떠난 상실감을 함께 나누었던 절친의 병은 가끔 나를 캄캄한 어둠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나를 달래려 해도 달래지지 않았다. 30년 지기의 아픔을 이해하지도 공감하기도 어려웠다. 친구와 함께 한 추억이 물밀듯 밀려오는 제주였기에 나도 모르게 멀리 한 모양이었다.

밤이 시작된 제주 공항 주변

 조카딸이 고3 담임인 데다 지금은 학기 초 3월. 부지깽이도 뛰어야 한다는 추수 때 풍경을 학교에서는 3월에 볼 수 있다. 눈 뜨고 학교 가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 채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곤 하는 나날이다. 주 6일 근무에 매일 야근을 일삼을 게 뻔한 날들. 돌아서기도 전에 업무가 쏟아져 눈이 핑핑 돌았다.

 그래서 마지막 비행기를 탔다. 몇 년 전 조카딸이 조천에 살 때였다. 공항에서 좌석버스를 잘못 타 안개에 갇힌 정류장에 홀로 내려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조카딸은 가능하면 나를 데리러 나온다.  

 그때 제주의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경험했었다. 왜 제주 사람들이 태풍이 와도 밖에 나가지만 안개가 낀다는 예보가 있으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지 말이다. 일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 안개 안개의 바다였다. 너무 무서웠다.


 첫 학교 제자가 오기로 해 다음 날은 제주 공항 주변으로 나갔다. 삼양 해수욕장 근처에서 좌석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저녁 비행기로 올 터이니 이호 해수욕장과 알작지 해변 그리고 외도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제주 바다를 제대로 보고 싶어서였다. 오랜만에 외도에 있는 해수 사우나도 가고 싶었다. 사우나 안에서 외도 주변 바다가 보이는 해수 사우나라 제주에 오면 일부러 가곤 했었다.

 가끔 비가 내려 우산을 쓰다 말다 하면서 천천히 주변을 걷는 기분. 말 그대로 여유가 있었다. 당장 집에 가서 저녁을 해 가족들을 먹일 걱정이 없으니 진정한 휴가를 얻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공항에서 제자를 데리고 버스로 삼양 해수욕장 주변 매촌 조카딸 집에 도착. 피곤해 그냥 잠이 들었다. 저녁은 미리 주문해서 가져온 국이 있어 그걸로 때웠다.

조카딸은 삼양 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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