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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Mar 31. 2023

제주 추억에 추억을 덧입혔다

이왈종 미술관과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

 생각보다 잠을 잘 잤다. 지난겨울 김장 시즌에 화성 온천을 갔던 때의 불면과는 달랐다. 어디서나 잠은 잘 자던 내가 이제 늙었나 싶어 살짝 걱정을 했는데. 아마 좋은 공기 때문이 아닐까?

 조카딸이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은 제주 외곽에다 공항의 반대쪽이다. 신제주에 비해 개발이 늦은 지역인 건 당연하다. 2층 창밖을 내다보면 곳곳에 농지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한적하고 제주 전통 돌담집들이 흔하게 보인다. 종일 차소리가 들리는 서울 우리 집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


 봄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도 명랑하다. 지난밤 약간 열이 있다며 일찍 들어온(8시 무렵?) 조카딸은 7시에 늦었다며 허둥지둥 집을 나선다. 어제 애기(?)들과 면담을 다 못해 오늘은 언제 올지 알 수 없단다.

 고3을 애기들이라 부르는 건 둘째치고 나도 모르게 녀석이 기르는 고양이를 슬쩍 쳐다보게 된다. 고양이를 위해 칼퇴도 복지라는 생각은 잡념일까? 7시 출근 밤 10시 퇴근을 해야 하니??? 고양이 뽀리가 일 년 만에 나를 보는 데도 확연히 반긴 이유가 이거구나 싶다. 하긴 내가 호구가 맞긴 하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뭘 자꾸 주려고 하니...

권뽀리. 이런 모습으로 낮이면 제 엄마 침대에 누워 있다.

 제주에 도착한 지 3일 차. 첫날은 한밤중 도착. 다음 날은 공항 마중.

 3일째 아침이 되어서야 어딘가를 갈 여유가 생겨 서둘렀다. 가파도를 알아보다 포기. 배를 예약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파도가 높아 배가 뜨지 않는다는 안내를 받았다. 내가 머무는 조카딸집 주변에서 가파도를 오갈 수 있는 운진항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기는 하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한 번 다녀왔으니 굳이 또?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대정에 있는 추사관도 가파도에서 돌아와 다녀왔었다.


 비는 부슬거려도 제주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귀포 쪽 이왈종 미술관을 먼저 보기로 했다. 비가 와도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간 것이다. 이름도 예쁜 위미를 지나 천천히 바다 풍경을 보며 도착한 곳은 그 언젠가 수학여행으로 가 본 정방폭포. 이왈종 미술관은 그 바로 옆에 있었다. 흐리고 비가 부슬거리는 터라 제주에서 서귀포를 넘어가는 길이 좀 걱정스러웠었다. 아무래도 한라산 자락을 넘나들어야 다녀올 수 있어서였다.

미술관 정원. 작품과 정원 풍경이 어울려 그것만 구경해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왈종 미술관은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동행한 민화작가 제자는 전시작품을 감탄 반 몰입 반 상태로 관람했다. 어느 한 작품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못난이 나무 그림을 비슷하게 모사하는 민화작가 이야기부터 각종 작품에 대한 평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대충 옥상까지 관람을 마친 나는 제자의 그림 삼매경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트 샵에서 기념품을 고르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샀다. 봄꽃이 만발한 봄 답지 않게 바람이 강해 몸이 으슬으슬하기까지 했다.

 제자는 요즘 창작 수업을 듣는 중이라고 했다. 민화와 미디어를 어떻게 연결할 지에 대한 고민을 이 미술관 관람으로 해결 실마리를 얻은 모양이다. 그림과 연결한 미디어를 본 흥분에 한참을 조잘거린다. 50대에 대학원을 다니는 것도 기특한데. 좋아하는 영역이 다르더라도 만학의 열정은 인정!

미술관 정원에 핀 흰 수선화.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서귀포 바다. 비가 내려 바다가 잿빛이다

 서귀포 바다는 잔뜩 음울한 재색이었다. 비는 간간히 흩뿌리고 바람도 만만찮았다. 우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환한 노랑과 연분홍 색감의 화사한 그림들 잔상이 머리에 맴돌아 마음은 풍요로웠다. 한동안 문화생활이란 걸 하지 못했는데 단번에 해결한 기분이 다 들었다. 제주의 색감을 제대로 표현한 작품들을 향유한 느낌! 제주에 오면 꼭 한 번은 다녀가라고 권하고 싶다.


 점심으로 공새미 59에 갔다. 비가 오락가락해서인지 올레 5길을 걷는 올레꾼들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이 한가한 이유가 그 탓인가 싶었다.

 공천포 주변 바다도 재색이었다. 파도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푸른 바다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대신 식당 입구 정원에서 흰 동백을 만났다. 사진을 한 장 건졌다.

공천포 공새미59 정원에 핀 하얀 동백. 비를 맞아 새초롬해 보인다.
위미 동백군락지와 왈종미술관 작품

 위미 동백군락지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비와 바람 탓에 제법 추웠다. 아무래도 옷을 더 껴입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동백군락지를 한 바퀴 돌며 천천히 산책했다.


 이곳은 아픈 친구와의 추억이 밀려드는 장소다. 조카딸이 제주로 이주해 처음 자리 잡았던 위미항 주변을 중심으로 하루는 남원 쪽, 하루는 서귀포 쪽 올레 5길을 걸었었다. 바다를 끼고 걷던 그 길에 끝도 없이 퍼지던 귤꽃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아른거리는 느낌이다. 

 바닥에 떨어져 즐비한 동백꽃 낙화를 보며 또 한 해의 봄이 지나가는구나 하는 흐름을 문득 깨닫는다. 짧은 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떠올랐다. 추억에 새 추억을 덧입혔구나 싶어 아련한 봄날. 비는 내렸어도 제주에서 이런 봄날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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