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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May 03. 2023

사오정들의 여행

 ‘집으로 안내할까요?’

 내비게이션에서 낭랑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전, 오대산 부연마을을 목적지로 선택했었다.

 그런데, 내비가 왜 물어봤을까? 의문이 생기자마자 설정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어야 했다. 좌회전 신호가 있다 없다로 투덕거릴 일이 아니었다. 순발력과 기민함이 남편이나 나에게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건 아닌데. 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그냥 다른 잡생각에 빠져 있다 정작 중요한 포인트를 수시로 놓친다. 그런 나이다.

상추나 무채 등도 깔지 않고 접시에 회만 한 가득이었다. 회를 즐기는 남편이 근래 이 정도 실컷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물치항 회센터에서 회에 매운탕까지 거하게 먹어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었을까? 배가 부르면 생각하기도 귀찮아지긴 한다.

10시 전에 가서 분업을 하는 매운탕 집이 문을 열지 않아 제법 기다렸다. 저렴한 가격에 만족도가 높은 아침이었다.

 아니면 오래간만에 비 오는 바다를 보고 시원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나는 제비를 봐서였을까? 서울에서는 제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시선이 나도 모르게 자꾸 제비를 따라다녔다. 등대까지만 둘러보고 오대산으로 출발하려 했었다. 그랬는데, 어느새 제비를 따라 물치항 회센터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회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원래 여행의 묘미는 마음 내키는 대로? 바쁜 것도 없고 비도 내리는 데 밥 좀 먹고 가도 되지? 이런 속내가 더 컸을까?

비 내리는 물치항을 날아다니다 잠시 회센터 베란다에서 쉬고 있는 제비
바다가 보이는 식당 베란다 전등에 제비집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제비도 시대에 부응해 집을 마련하는 모양이다.

 90년대 초 남편은 인쇄와 제본을 하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납품 날짜가 빠듯한 시점에 갑자기 독일에서 직수입한 수억짜리 기계가 멈춰버렸단다. 독일 기술자가 기계 수리를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상황. 남편은 기계를 뜯어 직접 수리를 했다. 고교 시절 배운 독일어 실력으로. 어마하게 큰 기계를 뜯어 설명서를 앞에 놓고 수리한다고 보고(아마 사고 치고 있다고?)하자 걱정이 된 회장님이 뛰어내려오셨단다. 지금도 회사의 전설로 회자된다며 남편이 가끔 자랑 삼아 하는 이야기다. 그랬던 남편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끔 내비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본인은 별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다.


 나는 태생이 기계치다. 오죽하면 전등 하나 제대로 갈아 끼우지 못할까? 전형적인 문과 타입. 게다가 남자 넷에 딸 하나 출신. 전기든 기계든 내가 뭘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자랐다. 그 방면 일손이 남아도는 집에서 굳이 뭘 고쳐? 내 차례는 오지도 않는데~. 당연히 지금도 전기, 기계 다 무섭다.

 

 최근 남편은 운전이 별로라고 말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가끔 남편의 기민한 순발력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스럽다. 남편은 운전을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과속을 즐기는 타입(?).

 부산 시댁을 다녀오던 어느 해 명절이었다.

 -가끔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줘야 차에 길이 든다나 뭐라나...-

 중앙고속도로 일부 완공된 구간을 거침없이 달려 나를 기겁하게 만들며 한 말이다.

 결국 '여기서 당신 운전 실력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니 제발 천천히 가자.'라고 말려야 했다. 툭하면 하던 과속 버릇은 집으로 속도위반 범칙금이 날아들기 시작하자 줄어들었다. 지금도 내비를 사용하는 이유가 과속 방지 안내가 있기 때문이라면 말 다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나이가 드니 달라졌다.

동해의 넓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비가 오는 데도 연휴 첫날이라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붐볐다.


 그날 물치항에서 꾸물거리며 투덕거린 건 맞다. 다행히 그곳에서 좌회전이 되었다. 설악산 방향에서 오대산 부연마을을 가려면 양양 어성천을 거친다. 어성천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그러나 오대산 강릉 방면에서 부연마을로 들어가는 산길은 곡예를 하듯 아득한 곡면의 산길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긴장감이 극에 달해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정도가 되어야 정상에 이른다. 그리고 저 아래 부연동 계곡을 낀 깊은 산마을이 고향처럼 아늑하게 내려다 보인다. 연중 봄철 딱 한 번만 가는 이유가 거기 있다.


 전날 남편과 나는 설악산 입구 이름만 거창한 온천 리조텔(?)에서 하루를 숙박했다. 오대산을 하루에 왕복하기에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날 늦은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도착한 뒤 비가 와 다행이라며 하룻밤을 장판까지 켜고 따뜻하게 잤다. 설악산 온천수로 샤워까지 한 다음 집에서 챙겨 온 간식 먹거리로 숙소를 나오기 전 배를 채웠었다.

 그리고 바다를 보고 가야 한다는 내 주장대로 바닷길을 따라가다 물치항에 들렀다. 등대만 보고 돌아서려 했는데 회센터 베란다에 제비집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회센터로 들어갔다.

비 내리는 물치항 등대. 설악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10시가 안 된 시간. 회는 말 그대로 싱싱했다. 무엇보다 가격 대비 양이 많아 모처럼 동해안에 온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매운탕에 밥까지 든든히 챙겨 먹어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즐길 마음까지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집으로 안내할까요?'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이 정도 시간이면 어성천으로 들어서야 할 것 같은데 무언가 이상했다.

 설악산 입구에서도 1시간이면 도착한다던 안내가 2시간으로 늘어나 있었다. 예전처럼 지도를 보는 대신 내비를 따라가는 상황. 내비에 도착 시간만 보이더니 어느새 각종 안내 멘트도 나오지 않았다. 내비가 불친절해진 것이다. 

 '물어볼 때 대답을 안 해서 삐졌나? 얘 왜 이러지?' 

 남편이 유머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머릿속으로 목적지 설정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면서도 구간에 따라 제법 내리는 비 때문에 신경이 쓰여 남편에게 자꾸 엉뚱한 말을 걸었다. 밥만 먹으면 운전하며 자꾸 졸음이 쏟아진다고 해서다. 

 요즘은 떠오르는 이미지를 단어로 바꾸는 순발력도 약해졌다. 여자들은 이미지만 대충 말해도 앞뒤 맥락으로 다 알아듣는다. 서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타박하지 않는 센스가 내장되어 있다. 이소리 저 소리 하다 까미가 자주 앉아 지내는 스크래쳐를 말하려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앞 베란다에 있는 스크레쳐 설명을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더니 나중에는 짜증이다. 자기는 부당한 짜증은 내지 않는 사람이라며 안 그러냐고 대답을 재촉하는데. 어이가 왜 가출하는지 알 것 같다. 무엇보다 대화가 자꾸 산으로 간다.


봄햇살이 가득한 이 자리에서 까미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양양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터널 터널 터널이다. 목적지가 집으로 바뀌었다는 걸 완전히 깨달은 건 인제 양양 터널에서였다. 11킬로나 되는 긴 터널을 지나 내린천 휴게소로 들어섰다. 오대산 부연마을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내비를 다시 설정해 보니 집으로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오대산행은 포기!

내린천 휴게소에 있는 숨길관. 국내 최장 터널의 공사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홍천 휴게소. 한우, 단호박, 사과 등의 지역 대표 생산물 모형으로 휴게 공간을 만들었다.

 결혼 기념과 남편의 생일 기념으로 가던 오대산 부연마을 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물론 내리는 비도 결정에 한몫했다. 하지만 씁쓸한 기분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이제 우리 부부도 손수 운전을 해 어디를 마음대로 다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다 보니 나름 엽렵하던 나날을 다 보내고 이제 사오정들의 여행이나 하게 되다니.


 최근 내 주변 친구들도 운전을 많이 접었다. 한 때는 미국이나 유럽도 거칠 것 없이 돌아다니던 여장부들이었는데. 늙어간다고 판단력이 사오정 수준으로 바뀌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이 들어 생기는 실수는 젊어서와 다르게 왜 자격지심까지 느껴질까?


 오랜 시간 가족 여행이 부부 여행으로 바뀌어서도 봄맞이 부연마을 행을 나름 즐겁게 다녔는데. 사오정은 오답을 내더라도 해맑게 웃으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이런 경우는? 이러다 결혼기념일도 동네 산책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닌지.

 앞으로는 영영 가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인지 마음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간식이 든 장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집사의 외박에 항의 중인 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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