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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Apr 14. 2023

너는 고난에 함께 할 수 있느냐?

 고난주간 토요일 아침. 동치미와 오이김치가 든 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근육이 소실되는 병을 앓고 있는 친구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결혼해서 수십 년 동안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나는 김치를 엄마에게 얻어먹고살았다. 요양병원에 계셨던 그 생애 마지막 한 달 동안 내가 면회를 가면 엄마는 치매로 많은 기억을 잃었음에도 우리 집 김치를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런 엄마의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래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거렸었다.

벚나무 밑동에 붙어 힘들게 핀 벚꽃. 그래도 대견했다

 그런 내가 이제 친구를 위해 동치미를 만든다. 갈수록 음식물을 삼키기 힘든 친구를 위해. 겨우 죽이나 간만 조금 된 국물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나가 이집저집 다니며 싱싱한 재료를 구해 집으로 오면 유튜브로 양념 비율 등을 다시 확인한다. 매운 것이나 혹시 사레가 들 수 있는 것들은 빼야 한다. 동치미를 담글 때마다 유튜브를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감이 확 떨어진다. 나도 그런 나이가 된 모양이다. 한 번 본 것도 쉽게 잊지 않던 시절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느낌이다. 그래도 유튜브가 있어 다행이다. 아니면 동치미를 직접 해 볼 꿈도 꾸지 못했을 텐데.

거센 바닷바람에 맞서 꽃을 활짝 피웠으니 곧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친구네 집에 들어서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오늘도 친구의 큰오빠가 와 계신다. 토요일마다 죽을 가지고 와 한 나절 동생을 마사지해 주신다. 휠체어에 앉은 친구에게 다가간다. 근육이 거의 사라져 삼각형이 된 얼굴로 그래도 나를 향해 웃는다.

 들고 온 짐을 대충 챙겨놓고 휠체어 앞에 주저앉아 친구의 발을 만져준다. 피가 통하지 않아 붉은색을 띤 발이 차디차다. 손을 만지는데 이제는 손가락도 굽은 채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한 달 만에 더 홀쭉해진 얼굴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화성 태행산 진달래. 해가 들지 않는 서쪽이나 음지에서 주로 피는 꽃이 진달래라며 그런 내용은 <시경>에 나와 있다고 나의 큰오빠가 알려주었다.

 그래도 밝게 웃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친구와 눈을 맞추었다. 이제는 자력으로 목을 가누기도 힘든 모양이다. 목소리를 잃고 걷기와 홀로서기를 잃은 친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원망의 소리가 흘러나왔었다. 그게 2 전이다.

 “하나님.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입원 한 번 한 적 없던 친구가 온몸의 근육이 빠져나가는 병을 앓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친구와 그 남편을 성경 속 욥과 비등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 상급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친구네 가정이 제일 먼저 받아도 아무도 불만 없을 거라고.

 순정한 믿음.

 기독교 가문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자랐다고 모두 그런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믿음을 온전히 실천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교회 일을 이리저리 피하는 나와 친구는 달랐다. 밤을 새우며 교회 일을 해도 그렇게 즐길 수 있는 걸 보며 내가 해 준 건 감탄? 직장인 학교보다 교회를 가는 날이 더 많다던 사람이었으니.


 세상 모든 일이  이해되는  아니다. 남에게 나쁜 일이나 모진 일을 저질러 놓고도 건강하게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하나님이 주실  있는 온갖 축복을  받아도 부족해 보이는 친구가 겪고 있는 병을 보며 원망이 쏟아지지 않을  있을까?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꼭대기에 핀 복사꽃. 지대가 높아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인 데도 해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워 봄을 알려준다.


 고난 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 친구의 남편이 나와 아내의 큰오빠 앞에서 ‘고난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병한 아내 때문에 고난에 대해 성경을 샅샅히 확인하신 모양이었. 부부가 은퇴할 때까지 아무 문제 없이 순정한 신앙으로 살아가던 가정의 가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아내의  앞에 얼마나 무력했을까? 듣도 보도 못한  앞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찾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작가 박완서는 자식을 잃은 엄마의 참담함을  < 말씀만 하소서>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아직도  참담함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친구의 남편 역시 얼마나 많은 시간, 치료제도 없는 아내의 질병 앞에 절망하며 하나님께 물었을까?   마디라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있는 말씀을  주시기를. 박완서 작가 못지않게 기도하며 부르짖었을 텐데.

 

 성경의 말씀을 그냥 믿기에 나는 지나치게 자아가 강한 편이다. 그래서 오래 의문이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돌아가시게 하셨을까? 영화재현 모습만 봐도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방법밖에는 없었던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친구의 남편은 베드로가 순교로 신앙을 완성하기까지 가졌을 고뇌에 대해서도 차분히 이야기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친구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펴지기를 마음속으로 간구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친구 대신 배웅을 나오셔서는 자꾸만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24시간 자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내 옆을 지키는 분에게 고맙다는 말은 내가 들을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해 드려야 할 말이었다. 진심을 다해. 하지만 눈물이 어룽거려 그냥 돌아섰다.


 돌아오는  안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나도 모르게 깨달았다.  ‘너는 나의 고난에 함께   있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라고 대답 하셨음을. 친구를 보고 돌아올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나를 달래기도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기까지 무너졌던 억장을 일으켜 세웠을 친구의 남편이 떠올랐다. 하나님과 아내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내가 방금 보고 왔다는  깨닫았는데도 목이 메었다.


 아직은 고난 중에 있는 권사 친구와 남편인 장로님에게 하나님이 욥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를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이 부활절 아침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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