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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Sep 14. 2023

울 것 같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초화는 한 때 내게 통행세를 받던 녀석이다. 공원 초화지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야, 너 나한테 캔 맡겼냐?'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모른척하며 눈을 피하고 앞발로 머리를 긁는 녀석에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 주변을 지나다니는 것은 가능하면 흙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서 수업하는 게 직업이었던 터에 교사 출신들은 다리 부종이나 무릎, 발에 문제가 많이 생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나 역시 과도한 몸무게와 직업 탓에 그런 질병을 피해 가지 못해 퇴직 후 한동안 정형외과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흙길을 찾아 산책으로 지나가던 길에서 만난 초화 녀석이 눈에 확 들어온 이유가 있다. 까미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 생김이 고만고만하더라도 녀석은 이상하게 정이 갔다. 특히 빤히 올려다보는 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작은 아들의 밥주는 고양이 개체수를 더 이상 늘리지 말라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지나갈 때마다 만나면 캔을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대놓고 기다리는 걸 알게 되어 일부러 찾아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두어 계절 이렇게 아옹다옹하며 밥을 먹였다. 하지만 2주 정도 제주에서 지내다 돌아와 보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일 년 이상 같은 길을 지나가도 보이지 않기에 더는 안 나오나 보다 싶었다. 속으로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름도 안 지었으니 찾을  수도 없었다.


 지난여름.

 은토끼님의 휴가로 매일 공원을 나가 저녁 산책 겸 그곳을 지나간 게 사단이었다. 나를 알아본 녀석이 다시 비슷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짠~ 하고 나타났다.

밥을 정말 맛나게 먹는다. 다음 날 가 보면 설거지해 놓은 듯 그릇이 깨끗하다

 고양이들 밥그릇을 씻으러 가면 음수대에서 기다리는 치즈 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는 걸 알면서 모른척하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치즈 냥이 둘에게 잡힌 이유는 고등어 때문이다. 고등어는 마른 타입이다. 하긴 동복으로 작은 아들이 입양한 나리도 날씬하긴 하다.

작은 아들이 있으면 아주 붙어살려고 하는 나리
나리 고등어와 동복인 사랑이. 치킨텐더를 좋아해 자주 줬더니 이제 먹는 요령이 생겼다. 앞발로 잡고 치킨처럼 뜯는다

 고등어는 먹이는 양이 만만치 않은 데도 자주 배고파하는 녀석이라 수시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뭔가 식욕을 제어하는 장치가 고장 난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먹는다. 고니와 함께 밥을 먹일 때도 멀쩡한 제 밥을 먹다 아들 고니의 밥그릇을 수시로 끌어당겨갔다. 먹던 밥을 제 엄마에게 빼앗기는 모습을 보면 그건 또 그것대로 화가 나 나도 모르게 고등어를 야단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결국 하루 한 번 밥을 많이 먹이고 먹을 걸 두고 오는 걸로 먹이 주기 패턴을 바꾸려 했던 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다. 고등어 모자가 주차장에서 대놓고 기다릴까봐 저녁에도 반드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음수대 출입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음수대는 요즘 아주 붐빈다. 맨발 걷기가 유행이라 그곳에서 발을 씻는 분들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딘가에서 눈치만 보던 치즈 냥이들이 나타나 밥을 보챈다. 어쩌다 늦어지면 기다리는 얼굴이 울 것 같아 보이는 건 내 마음 탓인가?




 은토끼님은 냥이들 밥그릇으로 일회용을 쓰지 않으신다. 고양이들이 먹기에 불편하지 않은 크기로 일정한 그릇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8월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냥이들 급식을 하는 장소가 아닌 곳에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일회용도 쓰지만 나도 그 그릇들을 닦아서 쓰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여기 왜 밥그릇이 놓여 있지?-

이 장소는 밥 주는 곳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릇을 챙겨 들다 고니를 닮은 고등어를 보게 된다.
밥그릇 안쪽에 녀석이 앉아 반질거리는 부분이 보인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박물관 뒤쪽 급식소는 고니 때문에 설치해 둔 곳이다. 고니가 사라지고도 누군가 건사료와 캔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너무 깔끔하게 먹어치워 도저히 급식소를 폐쇄할 수가 없었다.

 빈 밥그릇은 고니를 찾으러 저녁에 나갔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밥그릇이 놓여 있을 이유가 없는데 무슨 일이지 싶어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때 고니를 닮은 재색 고등어 머리가 나무 사이로 들낙거렸다.

 나도 모르게 ‘고니야?’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니가 아니었다. 고니는 코에 그런 점이 없다. 더구나 온몸을 드러낸 녀석은 꼬리가 드물게 짧았다.

 5년간 공원 고양이들 밥을 먹이다 보니 이런저런 사유로 알게 되는 고양이들이 있다. 나는 한눈에 녀석이 '꼬짤'의 새끼임을 알아보았다.

아로는 아롱이 첫 번째 새끼 넷 중 제일 예쁘게 생긴 암컷이었다. 꼬짤의 새끼를 낳고 중성화를 하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무지개다리를 건너 간 아로의 남은 새끼 두 마리는 은토끼님이 아미와 함께 데려다 키우신다. 달이와 별이로 이름 붙여 입양하신 새끼 둘이 바로 '꼬짤'이라고 불렸던 턱시도 고양이의 새끼들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유전자의 힘? 꼬리 짧은 게 너무 닮아서다. 한동안 박물관과 미술관 주변 알파 수컷이었던 '꼬짤'의 행패 때문에 은토끼님과 나는 만만치 않은 문제를 겪었었다.


 녀석에게 가지고 있던 캔을 주고 돌아서며 은토끼님이 밥을 주시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녀석을 보시고 틀림없이 마음에 걸리셨겠지.


 은토끼님을 만난 날 슬쩍 녀석에게도 밥을 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밥 안 주셔도 돼요.'~‘

 하시며 펄쩍 뛰신다. 그러나 알면서도 밥을 주지 않는 게 어디 쉬운가?


 은토끼님이 남은 휴가를 더 쓰시러 열흘 정도 공원을 비운 사이.

 가족들 저녁을 챙기고 고등어에게 밥을 주러 다시 나갔다 돌아오며 보니 빈 밥그릇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녀석이 눈에 뜨였다. 전날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으니 아마 긴 시간 은토끼님을 기다렸을 터. 날이 어둑해져 희미하게 보였지만 내가 은토끼님과 교대하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는지 도망치던 걸음을 되돌린다.


 무엇보다 녀석의 얼굴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초화. 밥 먹는 곳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다 어스름이 된 저녁. 전날도 만나지 못해 칠지도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평소에는 힘들다고 올라가지 않던 곳이다. 65개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멀리 타워가 보이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초화가 기다리다 반색을 한다. 어둑해지는 잔영 아래 원래 내가 오던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녀석의 울 것 같던 얼굴이 환해진다. 고양이 얼굴에 표정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힘들지만 잘 왔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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