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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Dec 31. 2023

 우리 사는 세상 한편에 고양이들이 산다

눈이 왔다. 펑펑.

23년. 이 해의 마지막 토요일.


눈이 내리는 날은 세상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눈이 내리며 주변 모든 소리를 먹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너무 조용해서 자꾸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기온이 영상이니 곧 눈이 그치고 비로 바뀌지 않을까?

하지만, 눈 내리는 기세가 점점 거세진다. 사락 눈에서 점차 함박눈으로 바뀌고 있다.

베란다 창가에서 눈 내리는 창밖을 보는 까미.

 눈이 내려도 춥지는 않은지 까미가 베란다로 따라 나와 눈 구경을 한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않는다. 베란다 창문을 조금 더 열어 줬더니 바람이 거칠게 느껴진 모양이다.


 이날부터 3일간은 날씨와 상관없이 박물관 주변 고양이들과 송구영신이다.


 등산화를 바꿔야 하는데 망설이다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여름에 산 등산화는 공원을 매일 다니다 보니 겨울이 오기도 전에 밑창이 닳아버렸다.

 등산화는 가격이 부담된다. 눈길에도 잘 미끄러지지 않고 가벼워야 한다는 조건에 맞는 걸 찾는 게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소매가 조금 나달거리는 감색 패딩은 작년부터 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날은 좋은 옷이 필요 없다며 다시 꺼내 입었다. 옷은 낡았지만 눈에 젖어도 아깝지 않으니 버리지 않은 게 다행처럼 느껴진다. 이런 날 고양이들 밥 주러 가는데 딱 맞는 옷이다. 아는 사람만 안 만나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질 걱정이나 없었으면 좋겠는데. 한 눈 팔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야지 하며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현관 앞까지 따라 나온 남편은 걱정이 되나 보다. 오전 급식은 건사료까지 챙겨 나가야 해서 옆으로 매는 가방에, 물병, 거기다 봉지만 3개다. 제법 묵직하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을 나섰다.


 박물관 뒤 급식소에서 건사료와 물병에 든 물을 일부 해결해 짐을 줄였다. 그곳 급식소 통은 넉넉히 채워도 다음 날은 항상 텅 비어 있다.

'까치들이 여기 고양이 건사료 두는 걸 눈치챘나?'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깍깍거리는 까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다 발을 재촉했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급식을 마쳐야 하는 사명이 남아 있다.

 눈은 그칠 기세가 아니다. 갈수록 펑펑이다. 평소와 다르게 사람이 오가지 않아 다소 적막하기까지 하다. 나만 고양이들 덕분에 이런 눈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만 있었다면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짐이 줄어들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여유가 조금 생긴다.

옆에 있는 겨울집에서 나오는 사랑이

 눈이 푹푹 빠지는 하늘공원 오르막 능선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사랑이는 하늘공원에 설치해 둔 제일 윗집에서 나온다. 평소 뚱고등어 녀석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눈 때문인지 녀석이 안 온 모양이다.

 "사랑아~. 그래~. 여기서 지내. "

밥을 주며 오후에 다시 올 테니 겨울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까미와 사랑이 나리 고등어 엄마 아롱이

 아롱이를 찾아 갈대숲을 지나 조각공원 주변 능선을 올라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거기까지 올라갔는데 없으면 어쩌지 했는데…. 거기 한 채 남은 낡은 겨울집에서 아롱이가 나온다. 까미 남매들이 입양되기 전 살던 집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밝아졌다. 갈대숲에 둔 새집에는 아예 들어가지를 않는다. 낡은 집이라도 들어가 주는 게 고맙다.

"아롱아~. 여기서라도 지내. 추운데 어디 가지 말고."


아롱이는 귀요미와 다롱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나를 밥을 먹다 말고 따라나선다. 눈송이가 아롱이 등에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박물관 버스 아래 데려가 밥을 먹이다 돌아서는데 마음이 찡하다.


 아롱이는 공원에서 다섯 번째 겨울을 나는 중이다.


귀요미와 다롱이가 있는 곳에 가니 눈 때문에 먹이를 구하지 못한 비둘기와 까치들이 나를 알아보고 떼로 날아든다. 너나없이 겨울을 나기 힘들어 보인다.

다롱이 주변까지 따라와 대놓고 기다리는 비둘기들. 건사료를 덜어 뿌려줘야 한다.

토성 둘레길로 올라가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눈이 내리는 대로 쌓이고 있었다

 토성 둘레길은 출입금지 줄이 쳐져 있다. 그러나 거기 배고픈 고양이 두 마리가 기다린다. 나를 만나지 못하면 밥을 굶어야 하는데 어쩌겠는가? 합리화하며 줄을 넘어갔다. 오르막 내리막 다 조심조심 걸었다. 혹시 안 나온 건 아니겠지?

차가운 눈 속에서 밥을 먹는 초화
삼색이 녀석은 닭가슴살을 먼저 물고 도망갔다 되돌아온다.

그럴 리 없다. 초화가 쓰러진 나무 등걸 위에 있다 내려온다. 눈에 묻힌 밥그릇을 찾아다니는 나를 곁눈질하며 주위를 빙빙 돈다. 그릇을 찾아 밥을 먹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눈을 맞으며 추위에 떨 녀석들을 기다리게 하느니 서둘러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출입금지라도 토성 둘레길을 따라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가벼워진 봉투를 가로 맨 가방에 챙겨 넣고 조심조심 둘레길을 내려오려는데 호숫가 주변에서 고양이 밥을 챙기는 분이 내려다 보인다. 안면이 있는 분이다. 저 지극정성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이 눈 오는 날 넘어지시는 일 없이 집까지 잘 들어가셔야 할텐데.

오후 급식을 위해 나가 보니 박물관 앞 조각공원이 눈사람 밭이 되어 있었다.

 우리 사는 세상 한편에 살고 있는 배고픈 고양이들을 위해 어떤 고생도 다 감수하시는 이런 분들이 있어 고맙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아롱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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