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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가네 이야기> 추억의 서장

(2)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by 권영순

우리 조상님들은 언제 화성군 비봉면 구포리에 터를 잡으셨을까?


안동 권 씨는 조선시대 가문 중 족보를 처음 발간할 정도로 쟁쟁한 문인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권문사시(權門四始)라는 자랑거리가 있을까? 조선시대 오백 년 동안 문관으로 급제한 인물이 가장 많은 명문가였으니 그런 자랑거리도 생겼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권씨 문중에 대해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는 자랑이다. 당연히 권가네는 딸들의 기세가 등등했다. 족보도 남녀 차별 없이 기록되었다. 권가 성을 가진 왕비들이 가문을 위해 어떤 협조(?)를 했는지는 잘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을 일부 읽었지만 그런 근거를 찾은 적은 없어서다.


권가네 여자들이 유별나게 ‘기가 세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나는 유순해 보이는 데도 주장이 분명하고 고집을 잘 꺾지 않는 편이다. 그런 내 성격은 우리 집 특수상황인 남녀 성비에서 찾은 적은 있다. 고명딸이니 당연히 그 정도 고집은 부려도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권가의 피가 나에게도 만만치 않게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 때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무언가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상사의 권위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내 태도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들의 직계에 대해서다.

오래전 구포리에 권 씨 성을 가지신 분이 흘러(?) 들어오셨다. 구포리 부근에 정착하신 그 분은 제법 가산이 넉넉해지셨다. 그러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분은 안동 본가에 사람을 보내 양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셨다. 안동 본가에서는 양자를 한 분 보내주셨단다. 그분이 우리들의 직계라고 했다. 그 후손들이 구포리 인근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렇게 양녕 대군 후손인 전주 이 씨와 어울려 집성촌 마을을 이룬 것이다.


구포리 내에서도 뱅골에 거주했던 권가네와 왜골에 살던 친척들 사이에는 물과 기름처럼 다른 점이 있었다. 같은 권가임에도 왜골 일가와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많았던 이유가 궁금했다. 명절에도 오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를 큰오빠에게 물어보았다. 큰오빠는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출신이다. 평생 한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조선왕조실록- 정조대왕>편을 번역했다. 더구나 장손이니 가족의 역사에도 관심과 일가견이 있는 건 당연하다.


- 족보상으로는 같은 파야. 다만 본생가를 따지면 왜골이 본파. 우리는 양자 온 집안으로 구포리에는 파가 두 개야. 본가로는 모두 손계라 왜골 일가와 시제는 같이 지내. 솔티나 분면 산소 시제를 공동으로 지내는 이유야. 그런데 양자 온 분 후손인 우리는 그 본생가 조상 시향에도 가. 김포로. -


추밀공 파는 같지만 우리 집안과 왜골 권가들은 언젠가부터 분파되어 다른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서대 편과 우리는 모두 체경 할아버지 자손이야. 그 종손이 비봉산 언덕(위치는 잘 모른다?)에 있던 집이고. 우리는 서대 편 양자 온 분 자손이라 돌림자가 왜골 일가와 달라. 남강공 후손이 쓰는 돌림자를 써. -


- 원래 양자 온 분은 체자 경자 쓰시는 분으로 서울 주자동에 사시던 분이야. 선조 때 남강공 권상이란 분의 후손. 이 집안이 남인 정권의 주축이었어. 체경 할아버지 후손인 우리들은 서대 편에 주로 살았어. -

KakaoTalk_20250717_113753416_01.jpg 큰오빠(공주대 명예교수)가 국역한 남강공 실기. 문중에서 의뢰해 작업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남강공 권상이란 분을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조선 중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사셨던 분이셨다. 효심이 지극하다는 평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내셨다는 기록이 있었다.


- 양자를 받은 분은 추밀공 손계인데 그 집안 후손은 주로 왜골에 사는 친척이야. -


대략 300년 전에 구포리에서 분파가 갈렸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시조로부터 36대고 추밀공파 손계야. 조선 후기에 당시 세도가였던 남강공 후손인 체경 할아버지가 구포리로 양자 오셔서 우리 집안을 이어온 거야. -


큰오빠는 36대 손 장남에다 안동 권 씨 족보를 직접 감수해서인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족보까지 꿰고 있었다고나 할까? 과거를 추적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머리가 핑핑 돌아 어지럽다. 그만큼 나와 무관한 먼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큰오빠는 아버지 소상 날 천안공원묘원으로 빨간색 커버의 안동 권가 족보를 가져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본인이 감수를 해서 우리 집에 여러 권 보관되어 있다던 그 책이었다. 나는 처음 보았다. 이미 오래전 금령 김 씨 집안으로 출가한 나로서는 솔직히 존재도 알지 못했던 족보였다.


그 권 씨 문중 족보에 큰오빠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14세 정헌 공계 17세 화산부원군 휘 복의 장자인 18세 좌랑공 온의 차남인 19세 부정 공 휘 욱의 손자인 21세 휘 상의 차자인 22세 치암 지중추 휘 황의 14대 손이며 23세 휘 호 중의 13대 손이고 24세 휘 대기의 12대 손으로 25세 휘 언의 차자인 26세 휘 체경의 10대손으로 35세 윤택의 장남으로 1953년 음력 정월 24일 화성군 비봉면 구포리에서 나서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결국 우리 오 남매는 체경이란 분의 직계 후손이며 우리 11대 종조부가 양자로 들어오셔서 왜골 일가와는 다른 파로 구포리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기록이었다.

나는 왜골에 일가가 있는데 양자를 굳이 본가에서 들이려 한 이유가 궁금했다.


- 세도가와 인연을 맺으려고 -


큰오빠의 담백한 답이었다. 한양에서 뚝 떨어진 구포리에 묻혀 살았어도 정관계 진출의 꿈은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고 양자 오신 체경 할아버지 이후 자손들 중 정계에 진출해 특별한 행적을 남긴 분은 없는 거 같은데? 조선 시대 출세 라야 과거에 합격하는 정도였을 텐데.

그냥 평범한 범부로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가산을 일구며 살았다고나 할까?

후손 중 화성군 땅 대부분을 소유했던 거부(?)가 있긴 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따지면 근 300년 동안 구포리에서 인물다운 인물이 나오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체경 할아버지에 대해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가족이야기를 쓰며 알게 되었다. 큰오빠가 집안 어른인 이표 할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이란다.


-체경 할아버지는 당시 남인 세도가 집안이야.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는 이래. 어느 겨울날 체경 할아버지의 서울 집에 머리가 허얗게 센 노인이 와서 뭔가 부탁을 하더래. 체경 할아버지가 아버님께 무슨 일로 저렇게 머리가 센 분이 추운 날 와서 부탁을 하냐고 물었대. 그 부친이 말하기를 비봉 구포리 일가인데 막내인 너를 양자로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다고 했대.

그러자 체경 할아버지가 ‘제가 가지요.’ 했어. 그렇게 구포리로 왔는데 한양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못 견디고 돌아가려 했나 봐. 거기다 부인은 한양에 두고 왔거든. 그것도 애를 가진 부인을.

불행히도 체경 할아버지는 병이 나서 한양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한양의 부인이 만삭인 채 내려오셔서 애를 낳고 비봉에 정착한 거야.

이 이야기는 명절 때 이표 할아버지가 들려준 거야. -


이표 할아버지는 구포리에 아직도 살고 계시는 가까운 친척분이시다. 구포리에 살 때는 명절이면 친척집을 모두 다니며 제사를 지냈다. 아마 그때 들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니?

체경 할아버지가 구포리로 오신 과정을 듣으니 그분의 성품이 짐작된다. 양자로 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기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더구나 일가라 해도 생면부지인 사람의 부탁이다. 그냥 들어 넘길 수도 있었다. 명문가의 막내였는데도 그런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신 이유는 뭘까? 분명 그분은 공맹의 도를 배운 대로 실천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것 같다. 덕행은 실천하지 않으면 말잔치로 끝난다. 무엇보다 그분의 선량함이 마음에 닿았다.


나는 우리 집안사람들이 지나치게 무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모질지 못한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일을 떠맡는 걸 자주 목격해서다. 그게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집안 내력이었던 거다. 체경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양자로 오시기는 했으나 본가가 그리우셨을 터. 갓 결혼해 아이를 가진 신부도 가족들도 모두 그리우셨을 텐데. 아직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집을 떠나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간다. 명문가의 막내로 살다 구포리 촌구석에 오셔서 느끼셨을 괴리감은 또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못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더 놀라운 건 종조모 할머니의 결단력과 용기다. 남편도 없는 구포리로 와서 살 생각을 하셨다는 게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명문가의 막내며느리로 시집 올 정도였으면 그 집안도 만만치 않게 여유로운 명문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만삭의 유복자를 가지고 구포리로 와 아들을 낳고 집안을 물려받게 키우신 그 할머니에게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확고한 소신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을 하신 분이 우리들의 종조모님이시다.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다.


긴 세월이 지나 체경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분들의 후손이다. 중요한 것은 핏줄을 통해 그분들의 꿈과 소망이 우리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분들의 후손으로 나는 그분들이 꾸셨던 꿈 한 조각이라도 이루며 살았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어떤 인생이라도 녹록한 삶은 없다. 먼저 일가를 이룬 전주 이씨와 왜골 권씨들의 은근한 견제와 대거리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유복자로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셨을까? 서러운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신 결정에 원망은 하지 않으셨는지? 힘든 순간이면 원망도 하실 수 있었겠지만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지 않으셨을까 싶다. 의지가 강한 어머니를 모시고 씩씩하게 살아내셨기에 그분의 10대 손으로 우리 오남매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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