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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야, 아프지 마라

by 권영순

왕십리역 6번 출구 11시.

3개월에 한 번 있는 약속이 서울숲 근처에 있는 날이었다.


집을 나서 공원으로 갔다. 은토끼님이 출근을 하시는 날이니 아롱이와 귀요미 밥은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토성꼭대기에 삼색이 녀석이 있다. 초화는 빗물에 흠뻑 젖어 나온 다음 날부터 볼 수가 없다. 밥을 주던 장소를 매일 가 보지만 나오지 않는다. 초화나 삼색이가 나오는 주변은 건사료를 주시는 분들이 있다. 비정기적으로라도 건사료를 챙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만나지 못하는 날이라도 굶지는 않을 거라 믿고 싶다.

KakaoTalk_20250816_163046744.jpg 초화 자리에 끼어들어 무조건 밥을 청하던 녀석. 요즘 가끔 보이지 않아 격정이 된다. 자기 밥은 꼭 챙기던 제2의 다롱이다.

첫 번째 미션은 달성하지 못했다.

삼색이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일찍 집을 나서 여유가 있었기에 주변을 빙빙 돌며 삼색이를 기다렸다. 나를 보고 눈을 맞추는 고등어와 회오리 냥이에게만 닭가슴살을 주고 돌아섰다.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왕십리 역을 가기 위해 5호선을 타러 공원역 역사에 들어가니 전철이 막 출발하고 있었다. 다음 전철은 12분 후? 근래 5호선을 잘 타지 않아 차량 배차가 길었음을 잊어버렸나 보다. 갑자기 약속 시간이 빠듯해졌다.


첫 번째 약속 장소는 왕십리역 6번 출구 앞. 그래도 늦지는 않을 거라 예측하고 의자에 앉아 최근 작은 아들이 다 읽었다며 넘긴 책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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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분실>이란 책이다. 읽어가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과학 분야에 문외한인 데다 작품에 사용된 언어들도 이해가 잘 안 된다. 머잖은 미래 우리들이 겪을지도 모를 세상을 짐작은 할 수 있으니 읽어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긴 했다.


AI와 안드로이드들이 갈수록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것들이 세상을 가득 채워도 인간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들. 그걸 믿고 싶다.


전철을 타고 왕십리로 향하는 데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월화에 부엌과 다용도실 물을 하수관에 버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세탁기야 이틀 사용하지 않는 건 괜찮다. 문제는 부엌. 싱크대에서 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다. 그것도 이틀이나?

1층에 사는 집 방 벽으로 물이 새 곰팡이가 생겨 고민하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수리를 해야 한다. 하수관을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면 될 텐데 굳이 물을 사용하지 말라니? 세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전날 오후부터 까미가 다시 설사를 했다. 남편과 까미를 교대로 살피다 약속 때문에 집을 나온 터라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는데. 뭔가 일이 자꾸 더 꼬여가는 기분이었다.


약속 3분 전 왕십리역 도착.

6번 출구를 찾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출구 안내판을 따라갔는데 안내가 갑자기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웠다. 출구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출구를 못 찾아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화를 했다. 6번 출구 도착이 늦어지면 다음 장소로 가는 데도 문제가 된다. 지하도를 왔다 갔다 하다 간신히 출구를 찾아 나왔다.


5분 정도 늦었다. 거기서 1차로 셋이 모이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다음 약속은 11시 10분 H부중 교문 앞. 6번 출구에서 7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햇살이 뜨거웠다.

까미 상태 확인을 위해 거실에 토퍼를 깔고 자다 깨다 해서인지 눈이 다 침침했다. 그래도 나 때문에 늦었다싶어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걸었다. H부중 교문 앞에서 두 분을 더 만나 점심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날 점심 약속 장소는 서울숲 인근. 영국 가정식을 한다는 '차만다'.


서울숲에서 약속 장소를 찾아갈 자신이 없어 일부러 왕십리역에서 만나 H중 교문 앞으로 가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었다. 교문 앞에서 만나 차를 탄 순간 뭔가 손목이 허전했다. 애플 워치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나 때문에 예약 시간에 늦어진 터라 시계를 찾으러 가봐야겠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계를 언제 봤는 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전철역에서부터 헤매다 다음 장소로 이동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결국 애플 워치를 잃어버렸다는 말도 못 하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분실한 애플 워치는 2년 전 작은 아들이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다. 마음이 안 쓰일 리 없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데 유별나게 피곤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모임은 교육청 독토론 지원단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의 모임이다. 공적인 일을 함께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새로운 도서나 최신 교수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배우는 게 많아 기다려지는 모임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챗GPT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궁금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집중하지 못했다.


왕십리보다 더 먼 거리 출퇴근도 매일 했었는데 이제 나도 체력이 떨어진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밤 까미 상태가 걱정되어 수시로 깨어나 잠을 설친 게 분실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토하며 경련을 일으켰던 며칠 전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숙면을 포기하고 자꾸 상태를 살폈었다. 먹는 것을 조금씩 나눠 주고 물도 수시로 갈아주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모임에 나왔으니 애플 워치가 풀려 땅에 떨어지는 걸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늦은 밤 돌아온 남편에게 애플 워치를 왕십리 어디선가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남편이 낮에 애플 워치에서 전화 통화 내역을 확인해 문자를 보낸다며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단다.

KakaoTalk_20250816_165419526_01.jpg 애플 워치를 주워 연락을 하고 보관했다 돌려주신 긱 미용실의 재하 디자이너님

다음 날 왕십리 '긱 미용실'로 가 분실한 애플 워치는 무사히 내 손목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것이라며 일부러 연락해 찾아준 재하 디자이너 분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웠다.

KakaoTalk_20250816_165419526_02.jpg 설사로 탈수가 심했던 까미는 이제 정상으로 돌아와 물도 캔도 잘 먹는다.

까미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배고프다고 새벽 3시에 핥아주고 툭툭 치며 나를 깨우는 데도 화가 나지 않는다. 식욕이 있는 데다 물도 잘 마시니 걱정을 덜었다.


까미야~ 제발 아프지 말고 엄마 옆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같이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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