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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오이(노각)를 보니

by 권영순

까미를 데리고 병원을 두 번 오가야 했다. 가끔 토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지켜보면 별문제 없이 지나갔었다.


북경에서 촬영을 마치고 5일 만에 돌아오는 날 밤에 안동을 내려가 일을 하고 이틀 뒤 새벽에야 돌아온다는 일정을 듣고 작은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덥고 습한 데 일정조차 빠듯해 안쓰러운 마음에 좋아하는 노각(늙은 오이) 무침을 들고 고양으로 향했었다.


집을 나설 때 설사기가 있는 까미를 보며 걱정스러웠는데...

뒷베란다 방충망에 앉은 매미를 보는 까미. 아직 기운이 없는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호기심 많은 까미에게는 드문 일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침대만이 아니라 집 안 여기저기에 까미가 토하고 설사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다. 대충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만 닦아낸 뒤 이동장을 꺼냈다. 눈치를 채고 숨는 까미를 찾아 이동장에 넣고 집을 나서며 남편에게 빨리 집에 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까미가 다니는 동물병원은 걸어서 10분 정도. 금방 땀범벅이었지만 이동장 안에서 야옹거리는 까미의 울음소리(이동장에 들어가면 평소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가 걱정스러워 서둘렀다.


수의사 선생님에게 집에서 찍어간 사진들을 보여드리며 어제 저녁부터 설사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상담을 마치고 선생님이 췌장염에 대한 검사를 한다기에 알겠다며 기다렸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디 아프지 않은 게 제일 중요한데. 그냥 잘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싶지만 얼마 전에도 치주염이 있어 동물 병원(비용이 만만치 않아 부담된다)을 다녀갔었다.


췌장염은 없는데 탈수가 심해 두 가지 주사를 맞고 3일 치 약처방을 받았다. 약 먹고 괜찮으면 안 와도 된다고 하셨다. 집에 가서 약을 먹이라기에 여기서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먹여달라고 요청했더니 지금은 까미가 아직 어리지만 나이가 들면 약 먹일 일이 자주 생길 테니 보호자가 먹여봐야 익숙해진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다만 나도 나이로 따지면 고목에 늙은 오이다.


까미는 4.6킬로 정도 몸무게를 가진 수컷 냥이다. 약도 잘 먹고 이동장에 넣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다. 공원에 입양하러 간 날도 스스로 이동장에 걸어 들어갔다. 함께 까미를 데리러 갔던 작은 아들이 놀랄 정도로 스스럼없이 굴었다.

공무원 연금지 8월호에 실린 목백일홍(배롱나무) 이야기에 저절로 공감이 되었다.

안심을 하고 집으로 왔다. 탈수가 심한 편이라지만 까미는 물도 잘 마신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지은 지 30년 된 구축 빌라 4층이다. 안 그래도 계단 오르기가 버거운데 까미까지 들었으니 땀이 등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더 문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까미의 울음 소리였다.


아주 오래전 이 비슷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다. 갓 돌 지난 큰아들이 열이 있어 병원을 갔더니 심하지 않다기에 주사까지 맞고 돌아왔다. 퇴근해 곧바로 들쳐업고 병원을 갔던 터라 허기가 져 잠시 부엌으로 나왔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뛰어가 보니 경기를 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괜찮다고 해 돌아와 겪은 그 일은 내게 오래 트라우마였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큰아들에게 열이 있으면 나는 그 옆을 지키며 열을 내리기 위해 물수건을 수시로 갈았었다. 그때의 끔찍한 장면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 안 곳곳을 괴롭게 돌아다니며 토하는 까미

이동장에서 꺼내자마자 까미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더니 하얀 거품같은 것을 여기저기 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수의사님과 통화를 하고 30분을 더 지켜보다 다시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주사 때문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셨다. 다행히 심하게 헐떡이거나 까부라지는 건 아니니 진정을 위해 산소실에 잠시 넣겠다고 하셨다.


까미가 진정이 된 후 병원으로 차를 끌고 온 남편과 돌아왔다.


다행히 까미는 안정을 찾았다. 원래대로 귀엽고 애교 잘 부리는 녀석으로.


그러나...

까미의 상태에 놀란 데다 여기저기를 오간 탓에 내 몸에 비상이 걸렸다.


제주에서도 많은 시간을 잠으로 때우다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은토끼님의 휴가로 며칠 연속 공원 냥이들 밥을 주러 다녔다. 정말 더웠다. 게다가 아롱이를 못 찾아 박물관 주변과 하늘공원을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까미까지 아팠으니 고목이 된 내 몸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들 둘은 내게 뭘 요구하지 않는다. 엄마가 힘들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입맛은 추억의 맛이다. 고추장을 양념한 오이생채 이야기를 꺼내며 작은 아들은 어릴 때 할머니가 해 주셨던 오이생채 맛을 잊지 못하는 걸 알았다. 그래서 굳이 노각을 구해 생채를 했다.


우리집 오 남매가 한창 공부를 하던 시절 나의 엄마는 동대문에 있는 제기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주종은 채소였지만 엄마는 늘 이문이 더 남는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조개를 까서 파신다던가 늙은 오이를 깎아 생채를 만들어 파셨다. 지금도 늙은 오이를 보면 그걸 깎으시던 엄마의 부지런하고 작은 손이 떠오른다. 그렇게 오 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내셨던 나의 어머니.

일년이면 십 수번의 제사를 지내야 했던 종부로서의 살림 경험과 노하우 거기다 손맛까지 좋으셨던 엄마의 희생과 노력 덕에 우리들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시장 거리를 지나다니다 노점에서 야채를 다듬으시는 아주머니들이 눈에 자꾸 밟힌다.


나도 모르게 노각에 손이 가고 그것을 또 한 번 사게 되었다. 겨우 3천 원. 크기로 보면 만 원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대충이라도 아는 나로서는 이걸 기른 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다 들었다.


시장에서 집의 거리는 도보 15분 정도. 버거울 정도의 무게인데다 들고 오면서 컨디션도 별로인데 이걸 언제 다듬어 오이생채를 할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늙은 오이를 정성껏 기른 분에게 살짝 미안했지만.

겨우 한 개였는데도 어설픈 솜씨로 깎아놓고 보니 제법 많은 양이었다. 얼마 전 독립한 큰 아들도 오이생채를 제법 좋아하니 양념을 해 가져다주려고 담아 놓았다.

겨우 한 개였는데 이만큼이었다. 엄마의 날렵하고 균일한 솜씨와는 너무 달라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손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솜씨를 물려받지 못해 늘 살림은 동동거리며 몸만 고목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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