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창 시절 1
‘말은 자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자라면 서울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의미는 각별하다. 큰 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대어로 자라기 위해 꼭 가야 할 장소. 아버지 시대에도 그곳은 서울이었다.
가끔 남편이 회상하는 부모님 이야기가 있다. 40이 넘어 얻은 막내아들을 서울 고등학교로 진학시키신 뒤. 두 분은 인근 울산 호계역에서 새벽 기적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셨단다.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울산에서 멀지 않은 부산이라면 형도 있으니 그래도 정서적으로 안심이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은 지금 미국이나 유럽 정도 되는 아득한 거리로 느끼셨던 모양이다. 한 번도 가보시지 못한 서울에서 살아가야 하는 막내아들을 생각하시면 그 걱정이 얼마나 크셨을지, 또 오매불망 얼마나 기다리셨을지 이해가 간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도.
우리 조부모님 입장에서도 아버지를 서울로 보내시는 데는 나름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을 거라 추측된다. 1945년 무렵이었으니 아무리 화성 촌구석에 살아 정보에 어두웠다 해도 사회의 대단한 변화를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눈 깜작할 새에 코를 베어간다는 서울에 아들을 보내 놓고 두 분이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 지도 역시 짐작이 간다. 아마 내 시부모님들처럼 뱅골 근처 야목 역에서 기적 소리만 들려도 아들 생각에 저절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셨을까?
다만 왜정 때도 할머니는 서울로 출가한 언니를 보기 위해 동대문을 꽤 드나드셨다. 야목에서 꼬마 기차 수인선을 타고 막내딸이 살고 있는 인천도 자주 다니셨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강도 방죽을 걸어 야목 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인천을 다닌 기억이 꽤 여러 번 있다. 그로 미루어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걱정되시면 이것저것 먹거리를 싸서 이고 지고서라도 서울을 충분히 오가셨을 분이다.
큰오빠는 아버지의 서울살이 후원자가 꽤 많았을 거라 추측한다. 우선 할머니의 큰언니가 계시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분을 동대문 밖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큰 이모이신 노 할머니는 이종찬 장군 집안으로 출가하셨다. 이종찬 장군은 친일파였지만 참 군인으로 알려져 나름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 꽤 여럿 있다. 구한말부터 명문 집안이었지만 전주 이 씨인 우리 할머니 집안도 배경이 꿀리지는 않았다. 동대문 밖 할머니의 위세가 그 집안에서도 나름 등등하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뒤 청요리로 홀로 이주하셨다. 청요리 주변 지리를 너무 잘 아셔서 구포리에서 거리가 제법 되는 것 같은데 이 동네를 잘 아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릴 적 상기리 외갓집에 자주 오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외가인 상기리는 청요리 바로 인근이다.
해방 후에도 동대문 밖 할머니 댁은 상당히 부유했다. 집안일을 건사하는 하인들이 여럿 있고 집의 크기도 엄청났다고 한다. 5.16 때 각종 집안의 이권을 빼앗긴 이후로 몰락했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6.25 전쟁 당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부족함 없는 가산과 위세를 가지고 있었단다.
서울로 와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살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아마 그 이모할머니의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추측된다.
나라는 해방 전후의 혼란기였지만 꿈만은 태산만큼 야망을 가졌던 아버지였기에 하루하루가 다소 고달파도 문제없이 견디셨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화성에서도 소문이 날만큼 정신력과 체력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노력만 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젊음과 열정이 남달랐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대문 밖 할머니의 성격은 우리 할머니를 보더라도 보통 까다롭지 않으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나마저도 꽤 여러 경로로 들은 기억이 난다. 넉넉한 가산에 하인들도 다수 있어 말만 하면 다 이루어지던 시절이니 오죽하셨을까? 우리 할머니는 작은 것이라도 완벽한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셨다. 디테일에 약한 우리 엄마가 할머니 눈에 들기 힘들었을 이유를 나는 지금도 이해한다.
할아버지는 무학이셨어도 아량이 넓고 판단력이 빠르셨다. 근동에서 지주 소리를 들으실 만큼 가산을 일구시는 데 필요한 역량과 자질 그리고 무엇보다 경영 능력이 남다르셨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시고 용모와 품행이 단정한 편이셨지만 할아버지의 폭넓은 도량에 비해 소견이 부족한 편이셨다는 평이 많았다. 뱅골을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할아버지가 화를 내시면 대부분 할머니의 소견 좁은 말이나 행동 때문이었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내가 딸의 입장이라 엄마와 할머니를 볼 때 엄마 편이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할머니의 잦은 지적과 꾸지람을 견디기에 갓 시집와 모든 일에 서툰 엄마도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있어서다. 15살에 엄마를 잃고 갑자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데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동네로 시집와 겪었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할머니의 지적질이 거의 폭언 수준이었다고 자주 이야기하셨다.
그 시절 남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엄마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셨다. 오히려 울타리는 할아버지였다는 엄마의 증언이 있다.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컸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할머니의 행동이 분명 지나친데도 아버지는 엄마의 하소연을 쉽게 넘어가 버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찍 외할머니를 여의고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으며 살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었다고. 다행히 손위 시누였던 막내 고모와 할아버지 덕에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고. 겨우 스무 살의 엄마가 겪었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기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엄마가 많이 안쓰러웠다.
1953년 남북이 정전 협정을 하기 직전 큰오빠가 태어났다. 큰오빠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자주 오갔다고 했다. 서울에 가면 아버지가 고등학생 때 입주 과외 교사로 살았던 세기네 집에도 인사차 들렀단다. 시골 우리 집도 넓은 집터를 가진 데다 식구들이 스무 명 이상 같이 살아 상당한 규모였다. 그러나 그 집은 크기부터 달랐단다. 그 집에 가서 각종 놀이(?)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니 얼마나 집이 넓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그 집은 광산 재벌이었다. 왜정 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서 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물론 전쟁을 위한 자금과 물자 조달이 이유였다. 손세기(202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기증한 손창근 씨의 부친이시다) 네 집이 그 일부를 불하받아 부를 일구었다는 풍문은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성정은 아마 그 집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신 모양이다. 연필을 쥘 수 있는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천자문 쓰기 과제를 받아본 우리 남매들은 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손세기 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으면 아직 고등학생인 아버지에게 직접 이런 제안을 했단다. 서울대 공대를 가라고. 서울 공대를 나와 자신과 광산 등 가족 사업을 같이 하자고. 사업가의 눈으로 봤을 때도 아버지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상당히 높이 평가된 모양이었다. 가족 사업의 참여를 권유할 만큼 능력도 성품도 인정하셨으니 말이다.
양복점에서 일하다 입주 과외 교사로 들어가는 과정에 누구의 도움이 있었을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복을 맞추러 왔다 아버지가 하도 성실한 데다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것을 본 손세기 네 아버지가 아들의 과외 교사 자리를 제안하셨다고. 나는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다만 손세기 네 집으로 들어간 뒤 아버지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가끔 화성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드는 일이 가능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의 청소년 시절 조선의 젊은이들은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전쟁터로 징용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해방이 사람들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심각한 상태였다. 좌우로 이념이 갈린 사람들은 어수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의지가 굳은 아버지는 한양공업고등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본인이 원하는 대학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
아버지 본인의 주장이라 해도 그 말이 믿어지는 이유가 있다. 주변 어른들의 증언이 꽤 있어서다. 특히 아버지의 막내 누이인 인천 고모가 그 중심에 있다. 막내 고모는 20대에 남편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뱅골로 돌아와 친정 식구들과 살고 계셨다. 당연히 아버지의 여러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기에 우리에게도 나름 유용한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하긴 나도 임용시험 준비를 하며 아버지 비슷한 큰 소리를 자주 쳤다. 임용고시에 단 한 명만 뽑아도 자신 있다고.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있으니 아버지의 이 주장에 반론하기는 좀 그렇다. 자기 자랑이 집안 내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고. 그만큼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을 스스로 조절하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계셨다. 속된 말로 뻥이나 치는 게 아니셨다.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분명히 있으셨다.
하지만,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펼쳐지는 마당에서 신은 우리 아버지에게 결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결코 긍정적인 포지션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운명을 관장하는 신은 이후 우리 아버지의 삶에 너무 야박하셨다. 노력을 무력화시키고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들었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건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한 적이 없는 데도 꿈조차 빼앗기는 삶을 살게 하셨다는 거다.
평소에 지극히 공정하고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신들이 전쟁 준비로 너무 바쁜 탓이었나? 아버지는 졸지에 닥친 비극 앞에서 당시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우왕좌왕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본인에게 다가올 그 비극이 일어날 조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셨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 말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