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by 권영순

늦도록 들지 않던 단풍이 순식간에 화르르 불이 난 것 같다. 여름이 길긴 길었다.

단풍.jpg 불이 붙은 단풍이 여기저기다

10월이 되니 공원 단풍나무에 불이 붙기 전부터 변화가 보였다. 바람의 기운이 달라지고 겨울 준비를 위해 초록잎들이 시드는 게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공원 고양이들의 겨울나기도 슬며시 걱정이 된다. 날이 추워지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춥고 배고플 고양이'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나무 둥치.jpg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우르르 쏟아지던 날 토성 삼색이 녀석이 이 나무둥치에 기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앉았던 자리가 반질거린다

몇 년 전부터 낙엽을 더 이상 줍지 않는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메말라간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도 조금씩 삶의 미련을 거두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미련이 많을수록 뭔가를 더 모으고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가을을 지나가는 나이가 되니 이미 가진 것들조차 더 털어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확연히 다가선다.

KakaoTalk_20251129_204942010.jpg 추석 연휴에 밥을 굶어보더니 이제 나를 보면 밥그릇 근처로 다가온다

10월 연휴 직전에 박물관 정문 근처 국기게양대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사랑이를 닮은 점박이를 보았다. 공원 고양이들 생김새가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녀석을 보는 순간 사랑이가 돌아왔나 싶어 심장이 다 뛰었다. 결국 은토끼님에게 사랑이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을 봤다고 말했더니 미술관 근처에서 지내던 아이가 왔길래 밥을 주고 계신다고 하셨다. 어쩐지 녀석이 있는 곳에 익숙한 밥그릇이 있더니!


다음부터 나도 녀석이 있던 자리에 캔과 사료를 두고 오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직접 얼굴을 보고야 먹이를 주는 데 녀석이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다시 가 보면 안면이 있는 치즈 냥이가 포식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캔값도 장난 아니다. 결국 직접 보지 않으면 두고 오지 않기로 했다.


10월 제법 긴 연휴가 이어졌다. 은토끼님의 휴무 기간이라 7일을 공원에 나가 고양이 급식을 했다.


배고픈 어떤 고양이라도 밥을 줘야 하는 건 맞지만 문제가 있다. 정작 먹여야 할 녀석들이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공원에 나가 고양이들 밥을 주는 이유는 아롱이와 귀요미다. 다롱이까지는 다 먹는 걸 보고서야 돌아선다. 배고픈 고양이들 모두를 거두기에 여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피해가 사랑이를 닮은 녀석에게 돌아갔다. 나를 경계하며 나오지 못하던 녀석은 사흘 정도 밥을 굶더니 정산소 근처 급식소에 내가 얼씬거리자 살피러 왔다 놀라 달아났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꼬리를 늘어트린 채 도망가는 녀석을 보게 된 나는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사람들 눈에 뜨이는 걸 감수하며 여기까지 살피러 왔을까 싶어서였다.

귀요미.jpg 한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뒤 사람을 경계하더니 요즘은 손을 스쳐도 피하지 않는 귀요미

10월부터 은토끼님은 고양이집에 포근한 담요를 넣어주시고 핫팩까지 챙기셨다. 따뜻한 곳을 유난히 좋아하는 고양이들 습성을 모르면 안 하겠지만 집에서 까미를 볼 때마다 아롱이의 잠자리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동안은 박물관 뒤와 하늘공원 위에서 지내던 아롱이가 박물관 정문 쪽으로 이동하더니 이제 박물관 야외 주차장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다행이긴 한데 공원 고양이들 중 아롱이는 나이가 많아 걱정이다. 사람이 늘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KakaoTalk_20251129_204834388.jpg 사랑이가 사라지고 여름과 가을을 이곳에서 보낸 아롱이
KakaoTalk_20251129_203424899.jpg 아롱이는 겨울집에 들어가 자지 않는다. 그런데 비 오는 날 여기 들어가 있었다며 은토끼님이 사진을 보내주셨다. 제발 여기서라도 겨울을 나기를 바라지만...

고양이들에게 유별날 정도로 마음이 넉넉하신 은토끼님에게 사랑이 닮았다고 밥을 꼭 줘야 하냐고 물은 적은 없다. 박물관 주차장 입구에 놓는 캔과 사료의 양이 만만치 않아도 그 마음이 이해되어 반드시 챙긴다. 그냥 공원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녀석들이 춥고 배고픈 밤을 보내지 않았으면 해서다.


토성 꼭대기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다리는 삼색이 녀석은 이제 하악질을 하지 않는다. 대신 얼굴이 익었다고 냐옹거리며 말을 걸기도 한다. 한때 이 녀석은 내가 밥 줘야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끈질기게 나온다며 불평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보이면 걱정부터 앞선다. 이렇게 서로 얼굴을 익히고 정이 들고 미운 정도 쌓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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