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노오란 꽃그늘 아래

by 권영순

그렇게 춥더니.

봄이 난만할 날만 남은 듯 낮 기온이 빠르게 올랐다.

넓은 조각공원 한쪽을 늠름히 지키고 있는 매화가 화사한 자태로 피어나더니 주변을 매화 향으로 물들인다.

조각공원 한쪽을 매화향으로 채우는 매화 나무

긴 겨울의 뒤끝자리. 꽃자리마다 꽃 필 날을 기다리며 기웃거리는 꽃망울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더니 조심조심 피어나던 산수유의 빛이 조금씩 바래가며 개나리가 웃음꽃을 피운다. 사람마다 비슷하겠지만 꽃이 필동말동하는 이 시기는 정말 마음이 훈훈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던 만큼 매해의 봄은 절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나이 들었다고 봄이 되면 술렁거리는 날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친구가 누워 있지 않을 때는 남녘의 매화를 보러 관광버스도 주저 없이 탔었다.

혼자지만 술렁거리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제주행을 감행했다. 제주의 겨울도 궁금했었다.

내과 앞에도 여러 이름이 붙는다는 걸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알게 되었다. 남편은 종합병원에서 세 군데 내과를 다닌다. 심장 내과에서 재재시술 이야기를 듣고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종양 내과에서 3개월 뒤에 오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올해의 봄도 그냥 보내는 게 아쉬워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짐을 꾸렸다.

함덕의 거칠 것 없는 파란 바다

공원 고양이들 밥을 챙겨 주고 까미와 남겨질 남편의 먹거리를 챙겨 놓고 늦게야 제주에 도착했다. 야자 감독을 다른 날로 미루고 공항으로 마중 나온 조카딸과 만나 함덕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수선화를 뜰에 심어 한창 예쁜 꽃이 피고 있었다

집안 내력이 꽃을 좋아하는 건지 작은 화단에 수선화를 세 분 모셔와 화사한 꽃들이 함덕 바다와 함께 반겨주는 느낌이었다. 동백꽃잎이 떨어진 빈자리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4. 3까지는 남은 동백이 계속 핀다는 말이 있다.

7시 이전에 출근, 퇴근은 언제일지 모르는 바쁜 조카딸 대신 하루는 큰오빠와 세화 오일장에 갔다. 비가 오는 날이었어도 비자림까지 산책을 마치고 집에 오니 비가 그림같이 그쳐 있었다. 다시 함덕 해변에 나가 바다를 보며 해수욕장 모래사장을 걸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다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 날은 혼자 버스를 타고 성산에 갔다.

유채 물결을 보기 위해서였다. 성산은 유채가 지천이었다. 돈을 받고 사진을 찍는 곳이 아니더라도 날이 화창해서 유채의 노랑이 유별나게 선명했다.

함덕 서우봉에 올해는 유채가 별로였는데 성산은 어디나 유채의 노란 물결이 일렁거렸다.

성산을 거쳐 버스를 타고 다시 세화로 향했다. 전날 비가 내려 세화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였다.

세화 바다에 가서 등대를 보며 걸었다. 함덕과 달리 한적했다.
수선화가 놓여 있는 카페공작소에 들러 당근 주스를 마셨다

짧은 여정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조카딸과 잠을 자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고양이 뽀리가 없는 집이 얼마나 쓸쓸한지 알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올해 13살인 고양이 뽀리가 없는 제주에 있어본 게 처음이었다. 늘 녀석이 있었다. 조카딸은 제주가 좋아 고양이 뽀리를 데리고 이주했다. 당연히 내가 갈 때마다 집을 지키며 나에게 주인 역할을 톡톡히 했기에 이번에도 먹거리를 챙겨갔는데...


2층 목욕탕 방수 공사를 하느라 뽀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삼양에 가 있게 된 거였다. 제주에 있는 시간이 짧았던 탓에 녀석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아직 열흘의 공사기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집이 어수선한 건 둘째치고 저녁이 되면 따라다니며 감기는 녀석의 온기가 없는 게 이렇게 심하게 느껴질 정도야? 싶었다. 집수리 중이니 누군가와 동행도 어려워 더 쓸쓸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가을 친구가 건네 화단에 심었다는 작약이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조천 중산간에 메밀꽃이 만개하고 함덕 타운하우스 집 화단에 작약이 제 자태를 뽐낼 즈음 나는 또 제주로 날아갈 수 있을까

며칠 만에 삼색이 밥을 먹이는 곳에 찔레순이 제법 자라 있었다.
턱시도 녀석이 삼색이 밥자리에 앉아 있다. 요즘 삼색이 밥을 자주 뺏는다.


개나리에 벚꽃이 곁들여 피어나는 화창한 봄날 오전. 서둘러 공원을 나갔더니 삼색이와 은밀하게 한 끼를 주고받는 자리에 턱시도 녀석이 자리를 빼앗아 지키고 있다. 며칠 집을 비워 까미에게 된통 혼이 난 터라 눈치를 보며 집을 나선 탓에 여분 캔을 마저 챙기지 못했는데...

캔값도 나날이 오르는데 가능하면 먹일 입을 줄이고 싶은 나와 먹거리를 더 확보해야 하는 공원 냥이 사이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겠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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