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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권가네 이야기를 마치며

        

엄마를 보내드리고 천안 공원묘원 게이트 하우스 앞에서 가족들이 모여 한 장

 나에게 어떤 장점이 있지? 외모에 대한 장점이라면 할 말이 없다. 있다면 남들보다 좀 귀염성 있게 생긴 거 정도. 날씬한 여자와 결혼했는데 첫 아이를 가지면서 비만이 된 뚱뚱한 아내와 살고 있는 자기 남편이 안됐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사기당한 기분일 남편이 안쓰러워 한 말일 테지만 진원 아빠 역시 비만으로 고민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니 그 기분이 이해될 것 같다. 그런 내게도 장점이라면 뭔가 시작을 하면 끝은 보려고 한다는 정도. 다행이다. 그런 성격이라도 되니 이런 마침 글도 쓸 수 있는 게 아닌지???

 물론 그 사이 막내 동생의 푸시업이 장난 아니었다. 채근과 채근 사이에 압박이 있었다. 무언의 압박이 아니라 만날 때마다 빚쟁이 저리 가라 하는 말로의 압박! 그리고 드디어 2020년 9월 말에 마지막 글을 마치고 있다. 2019년 5월에 시작했으니 1년 반 정도 걸렸다. 대학시절 습작기 이후 처음이다. 정후 말대로 치열한 나날을 보내느라 내 쓰기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간간히 글을 써도 그건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런 마침의 시간이 왔다. 

 권가네 이야기의 첫 제목은 엄마와의 추억이었다. 오 남매가 태어난 뱅골부터 사거리를 지나 제기동을 거쳐 마지막 구포리 산의 이야기까지. 거기에는 내 60년 넘는 기억들이 알알이 묻어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살아온 흔적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청요리에서 지낸 날 일이다. 두 분의 유품을 뒤적거리다 오래전 큰오빠의 박사학위 수여식 사진을 찾았다. 성균관 대학교에 있는 오백 년 된 은행나무 아래 오 남매 가족들과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큰오빠는 그때가 우리 오 남매가 무언가를 이루는 정점의 시기라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오 남매가 이후로 내리막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인생의 각종 파고가 오 남매를 향해 수시로 닥친 것은 맞다. 나는 아직도 내 인생의 정점은 매일매일이라고 믿는다. 이 순간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정점이라고 말이다. 앞으로도 이런 정점은 또 수없이 다가올 테고.

 오 남매의 정점을 다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기억력이 아쉬울 뿐이다. 무엇보다 이 기록은 내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관점의 차이는 많은 기억의 오류를 낳는다. 내 필력이 더 좋았다면, 내 기억력이 더 선명했다면 하는 아쉬운 장면들이 지금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엄마와 아버지의 기억력이 아직 선명하셨을 때 그걸 확인해 두지 못해 아쉬운 이유가 거기 있다. 특히 엄마의 부존재는 더 아쉽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도 맞물려 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희비가 어떻게 엇갈렸는지도 나타난다. 그 굴곡진 역사에서 우리 가족이 험난한 능선을 넘기 위한 고군분투를 나는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그게 아쉽다. 최명희의 <혼불>이나 박경리의 <토지> 비슷한 작품이라도 쓰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도대체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가늠자로 빗대기에는 너무 민망하지만 그냥 말은 해 본다. 그런 탓에 다들 작가의 무한 인내심과 놀라운 창작력을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나도 그게 아쉬웠다.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서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갔다. 나는 남의 글을 고치는 첨삭의 능력은 스스로 타고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기 것을 고치다 보니 어느 날은 다 뜯어고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으니. 자신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는 타인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느냐? 이 말은 학생들에게 줄곧 훈장질을 했던 내 지적의 핵심이었는데.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있었다. 

 태어나면서 나를 줄곧 지켜봐 온 둘째 아들 진형이는 내 노년에 글을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 들고 다니기 가벼운 노트북까지 선물한 모양이다. 엄청 부담된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들마다 당연히 묻는 이야기가 있다. 글은 쓰고 있냐고. 은퇴했으면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할 수 없이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다며 은근히 말을 돌린다. 무척 부담되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 볼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말을 더 돌리게 된다.

 한때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가렛 미첼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일생 한 권의 책에 모든 능력과 영혼 밑바닥까지 긁어 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마가렛 미첼의 능력을 따라잡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렇다고 이제 쓰기를 멈추고 싶지도 않다. 

 더 할 이야기가 남은 건 아닌지, 오늘도 공원을 산책하며 내게 물어본다. 사실 뭘 쓸려야 기억나는 게 더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두 분의 90년 가까운 인생 중 3분의 2를 함께 했는데 내가 아는 게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작년, 아버지는 혼자 지내시던 윤경 빌라를 떠나 청요리로 이주하셨다. 내 땅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강경함을 우리 오 남매는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삶의 의욕을 되찾으신 건 아니었다. 뭔가 의욕을 찾아드리기 위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아버지에게 내가 쓴 뱅골 이야기를 한 꼭지씩 읽어 드렸다. 그런 이야기를 뭐 하러 썼느냐 하시면서도 내가 잘 몰랐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일부 수정도 했다. 

 그 지점에서 내가 후회한 것은 이런 이야기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쓰고 마쳐야 했다는 반성이다. 엄마와 이 작업을 했다면 훨씬 풍부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었을 텐데. 

 그 생기발랄하고 재치 넘치는 언변을 왜 미리 기록할 생각을 못했지 싶어 아쉬운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의 소실과 빗댈 수 있다더니. 살림을 하면서 쉽게 팁을 줄 분을 잃어 순간순간 망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건 그 정도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족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얻은 것이 있다. 가족의 재발견이다. 세상에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내려져 있다. 아니 지금도 앞으로도 꾸준히 내려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덫이라고 말하거나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평생 힘들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책임만을 강요받고 자란 사람들이 끝까지 독립을 못하고 가족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실 현실에서도 자주 본다. 아직 나비나 나방이 되지 못한 채 늙은 애벌레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권씨네 가족으로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이 가족이라는 사실이 짐이 되지는 않았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천수에 가깝게 사시면서 우리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해 주셨다. 오 남매는 인생의 굴곡을 넘을 때마다 가능하면 서로 도우려고 애썼다. 적어도 우리 엄마는 오 남매의 화목에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그런 분의 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엄마의 그런 능동적인 태도와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배웠으니 앞으로 나도 그렇게 베풀며 살고 싶다. 

 조카들이나 아들 진원이 진형이가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처럼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무한 사랑을 늘 기억해 주고 자신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한없이 바닥을 치는 어려운 시기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씩씩하고 긍정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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