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씨 귀는 당나귀귀
금요일저녁부터 지금까지 왠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피곤하고 의욕이 없었다.
오랜만의 부모님 방문으로 아침부터 지금까지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난 뒤라서
기운이 없다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평일치 피로가 누적되었다고 하기에도 이상한것이 부정적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 사용법 매뉴얼
1. 든든하게 밥을 먹었는가? yes
- 엄마아빠랑 야무지게 먹음
2. 충분히 잠은 잤는가? yes
- 11시 취침 7시 30분 기상으로 수면시간 지킴
3. 샤워를 하거나 집청소를 했는가? yes
-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해도 우울감이 녹지 않는 걸로 보아 수용성이 아닌 듯. 집은 충분히 깨끗하다.
모두 O표라면 무언가 다른 문제와 스트레스가 있다는 소리인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고민했다. 나 자신이긴 하지만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
대낮에 부모님을 배웅하고 난 뒤
다시 한번 샤워를 해보고, 아주 조금 쌓인 빨랫감도 처리하고, 비가 그쳐서 햇살 드는 침대에 누워서 휴식도 취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속 한구석이 거슬리고 체력은 방전된 것처럼 예민해졌다.
책이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거실에 아이패드를 가지고 나왔다가 깨달았다.
아, 금요일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부모님 방문으로 하하 호호 밝은 모습을 보이느라 그것을 그냥 묻어뒀구나.
퇴근 후 그냥 잊지 뭐. 하고 잊을만한 유형의 화가 아니었는데 그냥 방치했구나.
(그냥 재빨리 잊는 게 나은 화남이 있고 아닌 화남이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느라 걸렀던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생략했더니 바로 티가 났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방울토마토를 우적우적 씹으며 브런치를 켰다.
나만의 대나무숲이 필요했다.
직장동료가 이렇게 나빴어요!!! 하고 구구절절 적진 않더라도 나에게 이런 종류의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을 터놓을 곳이 필요했다.
화남의 원인은 같은 말도 못되게 하는 사람이 바로 매일 얼굴을 마주 보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동료라는데에 있다. 전 직장 같은 경우는 짬이 제법 찼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에서 무시해 버렸지만, 이곳에선 아직 일을 배우는 입장인 을이라는 것에 스트레스의 원인이 가중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저 새끼는 말을 저따위로 해도 나는 좋게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는 아직 나에게 너무 낯선 타지이고, 저 새끼는 좋든 싫든 사수이며, 1년 동안은 꼼짝없이 한 팀으로 지내야 한다.
물론 어떤 종류의 우울감은 생각을 떨쳐냄으로써 정신건강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도 있다.
나는 주로 이것을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어둬도 계속 생각이 난다면 어떤 표시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최근에 나 사용법 매뉴얼에 추가된 사항이기도 하다.
사소한 소비, 예컨대 시발비용이나 제정신비용으로 쇼핑을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은 소소히 도움은 되었지만 이것은 평소에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먹는 것은 중요하지만 물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수면장애가 심할 때도 의존하지 않은 방법이다.
커피는 좋아하지만 수면에 방해가 되니 주말아침에만 마시는 보상이다.
운동은 좋은 방법이지만 신체를 잘 운용할 줄 모르는 내가 아무 운동이나 하긴 어렵기 때문에, 주변을 물색 중이다.(전 직장에서는 퇴근 후 요가를 했는데 여기는 요가와 필라테스를 합쳐서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대나무숲은 이곳이다.
블로그처럼 광고성 댓글이 달리지도 않고, 사진을 올리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가 나에게 크게 관심 가지지 않는 고요한 대나무숲.
마음을 챙기는 시간은 늘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도 깨닫는다.
아무튼 그 새끼가 나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