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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님 Apr 19. 2023

부담 주지 마세요

나한테 왜 이래

보통의 사람은 타인에게 부담을 안겨줄까 봐 언행을 고르고, 또는 그것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과하면 뭐든 탈 나기 마련이지만 배려하지 않고 무례한 것보단 낫지 않은가.


물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본 우리나라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내가 계산할게!' 하면서 식당 앞에서 서로 카드를 내미는 것이라던지(계산하는 아르바이트생만 곤란합니다 해결 보고 와주세요), 용돈 봉투 같은 걸 서로 넣어주려다 이내 상대방이 받지 않으려 하자 휙 던지고 차로 출발해 버린다던지 그런 것들이 있다. 

뭔가 너무 상대를 위하려다 재밌는 풍경이 벌어진다.


그런데 왜 나 스스로에겐 부담만 안겨줄까? 

신나게 전날 밤 짜던 그 계획은 모두 미래의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왜 지키지 않았냐고 불평을 하기도 하고, 뭐 내가 그렇지 뭐 하고 스스로 업신여기기도 한다. 


계획과 강제성은 다르다. 나만 봐도 자의던 타의던 나 스스로를 강제하려다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뭘 해보려는 나 vs 살던 대로 나'가 만나면 후자가 이기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할 땐 성의표시로 커피나 밥, 간식거리를 사다 주고도 모자라 고마워한다. 혹은 고마운 척이라도 한다.

스스로에게는 성의표시나 달래기를 시도도 하지 않고, 실컷 혼자 다짐하고 '이제 해봐.'라고 일거리를 던져줘 봤자 할리가 없다. 계획할 때의 나와 그것을 실행할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도 계획하고 다짐한 후 대뜸 나에게 "자 이제 10K 마라톤을 뛰어보자."라고 해봤자 "제가요?"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이제 걸음마 단계라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잊어버린다.


나는 필요한 일을 해내기 위한 난이도는 '물 한 잔 마시기'와 비슷한 정도로 설정한다. 언젠간 상향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나의 좌절 감당 수위와 부담을 느끼지 않는 난이도는 이 정도이다. 


물론 세상일은 늘 물 한잔 마시는 것보단 훨씬 어렵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담감을 느끼면 나는 자라처럼 숨어버리고 마니까 어떻게든 나를 잘 달래어 이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인 성취나 보람, 습관 만들기 정도면 꼭 하지 않아도 자존감을 다운시키는 것 외엔 큰 문제는 없겠지만 직장일은 부담을 느낀다고 안 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물 한 잔 마시기' 정도가 단계로 작게 나눈다. 

예를 들면 한 건의 서류파일을 올린다면 

1. 파일명 만들기 

2. 담당자란에 이름 적기부터 해둔다. 

바로 생각나면 내용은 정리가 되지 않았어도 우선 파일을 만들어 둔다. 이 단계를 절대 미루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내용은 천천히 기한만 어기지 않고 해도 괜찮다. 이렇게만 해둬도 미루거나 부담감을 느낄 일이 확 줄어든다. 우선 '시작'을 전 날의 내가 미리 해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하기 싫다면, 할 수 있는 부분 부터한다.

칸이 있다면 한 칸 채우기, 프로젝트 이름이 들어가는 곳에 모두 적어두기, 날짜 적어두기, 사진 첨부하기 등

일을 하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테트리스처럼 부분 부분 완성한다. 

꼭 차례로 작성해야 하는 문서가 아니라면 위칸 적다가 아랫칸 적고, 뒷장부터 채우다 앞장으로 와도 괜찮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선 확실하게 오류가 나지 않을 부분부터 채운다. 


시작과 중반으로 넘어가기 전까진 '날 잡고'하는 것이 아닌 부분 부분 짬날 때 완성해 둔다.

그리고 마무리 때는 마감 전에 시간을 내서 완성한다면 적어놓은 부분을 잇고, 빠진 부분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부담이 확 준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것을 보고 '어라?' 하는 마음도 든다.

물론 이때의 태도가 아닌 기분만 간직하고 미루다가 '그거 30분 만에 끝나던데?'하진 않길 바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분이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1시간이면 끝날일을 주말 저녁까지 걱정하면서 하지는 않고 있다가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완성한 뒤의 내 기분이다. 일단 걱정하던 시간만큼은 자유시간을 빼앗긴 것 같아서 1시간 일을 3일은 한 것 같고, 하고 나서의 성취감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 일을 해냈는데도 기쁘지 않아서 이런 성실한 일엔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충분히 미룬 뒤에 해봤자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작고 작은 단계의 일을 완료한 후의 확실하고 자주 발생하는 성취감이다.


일 뿐만 아니라 습관 만들기나 무언갈 꾸준히 하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몇 가지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음 이건 다음에 미래의 내가 보도록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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