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좋아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그 겨울의 찻집-
20대였는데 나는 조용필을 좋아했다.
그의 노래는 뽕짝도 아니었고, 발라드 같았지만 예스러운 발라드라고 해야 하나? 이런 장르를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듣고 있으면 그 감성이 그렇게 좋았다.
그중에서도 "그 겨울의 찻집"을 좋아했는데, 가사를 음미한 적도 없고 무슨 뜻인지 헤아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저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었을 뿐 특별히 이유랄 것도 없이 좋아했다.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뭐 굳이 이유와 동기와 배경 등등이 필요할까.
이 노래를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해서인지는 몰라도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책에 부록으로 들어있던 CD의 재즈클래식보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생각났다.
겨울만 되면 "그 겨울의 찻집"을 들었다.
그리고 겨울만 되면 " 그 겨울의 찻집"이 제목으로 어울릴만한 내러티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노래는 그 겨울의 찻집에서 연인과 만나던지 헤어지던지 그래야만 완성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종종 그 겨울의 어느 찻집에서든 연인을 만나고 헤어졌다.
젊은 날(20대)에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 물으면 으레 여름이라고 말하곤 했다.
왜 여름이 좋았던가 하니 돌이켜보면 그 계절이 좋았다기보다 친구들과 여름 방학마다 다니던 여행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름은 청춘의 계절이라 했던가.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많이도 여행을 다녔다.
의미 있거나 지적인 여행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여름의 열기 그대로 정열과 광란의 밤들을 보냈던.. 지금 생각하면 젊음의 광기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나이에 맞게 노는 거라고 생각했고, 한치의 후회도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는 오만데를 여행했다.
그런데 내 생에서 큼지막한 이벤트들은 언제나 겨울에 일어났다.
생일이 11월인 나에게 몇 년이고 '겨울 아이'를 불러주던 그 아이도(고등학교 때), 나보다 더 큰 곰인형을 눈을 맞으며 낑낑대며 들고 오던 그 아이도(얘도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내게 스노보드를 가르쳐주던 그 아이(얘는 20대 때)도 모두 겨울에 더 특별해지곤 했었다.
추위를 워낙 잘 타는 체질이라 나는 겨울은 싫어라고 외치고 다녔건만 몸은 여름을 원해도 마음은 늘 겨울에 있었던 것도 같다.
겨울만 되면 스르르 밀려오는 잠처럼 온 정신이 노곤노곤했다. 차분해지고 얌전해졌다.
다른 계절에는 센 언니로 보이던 내 인상이 겨울만 되면 그냥 예쁜 여자로 보이기도 했다.
20대 후반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대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은 남자친구를 만난다며 크리스마스를 잔뜩 기대했던 반면 오히려 나는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가 있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 년 내내 드글대던 많은 남자들의 대시는 겨울만 되면 잠잠해졌다. 20대가 되면 괜찮은 남자친구가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나는 의외로(친구들이 의외하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없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옆구리가 시리다는 둥 그런 얘기는 한없이 초라한 말 같아서 싫어했다. 남자친구가 꼭 있으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분명 쌈마이웨이가 있는 여자였다.
남자 친구 없이 우리끼리 노는 겨울은 더 재미있었다. 보드를 타러 스키장에 다니고, 살다시피 하는 친구들과 매일 술집에 모였어도 나는 겨울이 시리진 않았다. 간혹 "우리들의 청춘은 이다지도 지루하단 말이더냐" 하며 신세한탄을 하곤 했어도 남친이 있으면 삶이 덜 지루하리라는 법도 없으니. 그 겨울의 찻집에서 종종 만나고 헤어지던 남자들은 단 두 명, 그리고 없었다. 그것도 아주 쉽사리 없어졌다. ㅋㅋ
여름 시원한 에어컨 속 술집보다 겨울 따뜻한 온기가 도는 술집이 더 좋은 건 지금도 그렇다.
겨울은 술 마시기 아주 좋은 계절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보아하니 나는 사실 겨울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겨울이 되면 없는 남자친구를 만들 생각보다 하늘에서 펑펑 눈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다.
<리틀 포레스트>의 그 겨울 감성. 그게 내가 딱 원하는 겨울이다.
친한 친구 단 몇 명과 따뜻한 온돌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막걸리든 와인이든 난롯불가에서 쉴 새 없이 건배를 외치며 우리의 인생을 논하는 것. 창문을 열어두면 차가운 공기가 따뜻한 실내 공기를 훅 덮치듯 들어와 그 쌀쌀함과 따뜻함의 어느 중간 즈음에서 나와 너의 이야기를 섞는 것. 그러다가 눈이라도 내린다면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겠지.
겨울은 몸만 추울 뿐 마음은 오히려 더 따뜻해지는 계절이다.
그리고 푹 처박혀 종일 책을 읽기에도 그만인 계절이다.
따뜻한 커피도, 따뜻한 뱅쇼도, 따뜻한 사케도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그러니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도 싶고 ㅎㅎ
아무튼 나는 겨울이 좋다.
여름이 좋은 줄 착각하며 살았을 뿐 사실은 난 겨울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정확하게 알게 된다.
곧 들이닥칠 겨울. 올 겨울에는 그 겨울의 찻집에서 만나고 헤어질 남자는 없지만, 그 겨울의 찻집에서 조용한 감성을 끌어모아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