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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또 무엇인가

by 그레이스웬디
"매일이 그대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그 시간이 더 바랄 것 없이 유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몽테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몽테뉴의 수상록, 김영하의 작별인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등등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해볼 수 있는 책들이 많다.

나는 사실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많은 책들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리 대비를 하고 심지어는 계획도 세우라고 한다.

준비된 이별. 나 스스로 준비하는 이별. 그것이 죽음이라고.


책 속에서 죽음을 대할 땐 '그래, 나도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피부로 와닿지 않는 죽음은 아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지 않아서라고 생각이 된다.

절친도, 가족 중 그 누구도 아직 내 곁은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내 주변에서 죽음들이 일어났다. 절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밥 먹고 웃고 떠들었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한 달 사이에 두 명이나 그렇게 갔다. 한 명은 지난 글에 얘기했던 아는 동생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불과 며칠 전에 자살한 남편의 친구였다.

그들은 준비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 동생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남편의 친구는 준비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책에서 말하듯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좀 더 근사한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몽테뉴처럼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식을 준비하듯 장례식을 준비하는 건 어쩌면 멋진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은 죽음이 너무나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아직 살아갈 날이 무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카르페디엠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참사들이 있다. 세월호와 핼로윈. 모두 젊은 청춘들이 별이 되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닥쳐온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채 느끼지도 못 헸을 것이다.

안타깝다. 그들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를 무참히 뺏어가 버린 운명이 너무도 원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참사에 대해 생각을 해 보자. 그들은 그렇게 그곳으로 몰렸어야만 했나.

젊음을 불사르기 위해 그렇게 모여들었어야 했을까. 그래서 나는 더 안타깝다.

세월호와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그들을 이태원에 모이게 하는 악마의 유혹이 있었을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사람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준비된 이별과 갑작스러운 이별은 남겨진 사람에게 주는 슬픔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별이든 감당하기 힘든 일일 테지만, 그래도 준비가 되는 것이 서로에게 덜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몽테뉴도, 미치 앨봄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리라.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이별을 해야 한다면.. 나는 숨을 쉴 수 있을까?

그 고통이 어떻게 다가올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상상조차 못 하는 그 고통을 지금 느끼고 있을 유가족들을 보니 눈물이 난다.

얼마나 많은 후회와 죄책감과 미안함과 그리움이 집약된 고통이란 말인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가혹하다.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 숨 돌리고 나면 또 갑자기 미안해지겠지. 정신이 번뜩 들겠지.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생을 더 단단히 붙잡게 된다. 그래서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말이 있던가.


조금 더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과하지 않게 매일을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

감사함은 물론이고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내려놓음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한다.

삶이 허망하다. 인생무상이다. 부질없다. 우리 모두는 잠시 여기에 머무를 뿐 돌아갈 곳은 태초에 왔던 그곳이므로.

그렇지만 매일을 영원처럼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마틴 루터의 말처럼, 살아있는 동안은 나의 하루를 아끼고 소중히 해야 한다. 마치 아가의 볼을 쓰다듬듯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다시 생으로 돌아온다.

안타까운 영혼들을 추모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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