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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청을 만들면서

글쓰기를 생각하다, 아주 거창하게

by 그레이스웬디
글쓰기는 생강청을 만드는 일과 비슷하다.


2018년도, 요리 그램에 한창 열정을 불태우던 나는 거의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었었다.

아주 사소한 데미 소스, 돈가스 소스, 탕수육 소스부터 맛간장 등등 요리에 쓰이는 베이스들도 모두 만들었고, 치킨도 직접 집에서 튀겼으며 그래서 배달음식을 일절 먹지 않던 시절이었다.

인스턴트는 상상도 못 했고, 밀키트가 웬 말이냐, 그런 건 내 주방에서 있을 수 없는 거였다.


모든 조리과정을 사진을 일일이 찍어가며 해내기란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특히 손에 장갑을 끼고 해야 하는 일들이라면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번씩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는 고생스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계절마다 혹은 절기마다 꼭 해야만 하는 저장음식이라든지 전통음료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 있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 또는 겨울 초입에 해야 하는 먹거리가 바로 생강청이다.

돈 주고 사 먹는 생강청을 입소문을 따라 혹은 그들(만든 이들)의 말을 믿고 몇 번이나 구매해보았지만, 역시 파는 음식은 대중적이기만 해서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냥 달기만 했거든. 뭐 전부 다 그런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사 본 것이 대부분 그랬을 뿐.


4년 만에 생강청을 다시 만들면서 뜻밖의 생각을 하게 된다.

4년 전에 생강청을 만들 때 내 머릿속엔 오직 사람들의 반응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막노동을 해가면서 정성스럽게 생강청을 만드는 걸 보면 모두들 대단하다고 하겠지?'라는 생각.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기 짝이 없다. 민망하다.

그 사람들의 반응이 나에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명 스타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

이번에도 4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생강청을 만들었지만 그때처럼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보여줄 곳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이 글에 첨부한 사진들은 모두 4년 전 찍은 사진이다.

생강청 만들기

4년 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번의 소소한 깨달음.

글쓰기는 생강청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갑자기? ㅋㅋㅋ

모르겠다. 갑자기 생강 껍질을 벗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에는 물에 불려둔 생강 10kg을 밤늦게까지 껍질을 벗기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팔을 걷어붙이고 와서 같이 껍질을 벗겨주었다.

둘 다 악 소리를 내며 다시는 생강청 따위는 안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양을 대폭 줄였다. 3kg으로 줄였지만 생강은 단 한 톨이라도 껍질 벗기는 게 여간 노동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껍질을 벗기기 위해 하룻밤을 물에 담가 불린다.

그리고 4년 전 어떤 방법이 가장 쉽고 빠르게 껍질을 벗길까 하며 과도로도, 수저로도 벗겨보며 터득한 결과 티스푼이 가장 편했던 기억으로 이번엔 혼자 3kg 껍질을 벗겼다.

막일이 아무 생각 없이 몸만 움직이기에 편한 작업인데 이번엔 혼자 조용히 생강과 마주하고 있노라니 한 톨 한 톨 껍질을 벗겨갈수록 점점 글쓰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 생강이 뭐라고 이렇게 힘들여 이 작업을 하고 있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니, 힘이 들어도 생강의 효능 때문에 이 고생을 하지 않냐 라는 답이 나왔다.

매일 글쓰기를 하는 일도 생강 껍질을 벗기는 일만큼 고되고 힘들다.차라리 안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몸이 피곤하기도 하고 다리가 저리기도 하며, 손가락이 아프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업을 다 끝내고 나면 해냈다는 뿌듯함과 건강한 생강차를 겨우내 먹을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글쓰기가 힘들다고 피하지만 않는다면 힘들여 껍질을 벗긴 생강처럼 반드시 나에게 더 큰 효능을 가진 결과물을 준다는 것 또한 생강 껍질을 벗기면서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그래. 글쓰기 힘들지. 사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누구나 힘들어.

하지만 건강한 생강차를 마시려면 당연히 힘들어야지. 쉽게 만들어 설탕만 잔뜩 넣은 생강청은 멋모르고 한 번이나 사 먹겠지 두 번은 안 사게 되는 것처럼. 대충 쓴 내 글은 설탕만 잔뜩 넣은 생강청과 같겠지.

왕이 되려면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듯 세상에 힘들이지 않고 그냥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나에게 생강 껍질을 벗기는 것만큼 힘든 일은 글쓰기지만, 벗겨내지 않으면 그냥 못먹는 생강일 뿐이라고.


생강청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 역시 생강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다음엔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된다.

글쓰기도 초고를 어떻게든 써 내려가는 일이 생강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것만 해내면 배즙과 설탕을 적절하게 추가하고 화룡정점으로 시나몬을 투하하여 오랜 시간 푹 끓이면 된다.

초고를 완성하고 퇴고를 하면서 배즙과 설탕을 넣고 시나몬으로 향기를 더해주면 결국 하나의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 쓰기를 부담스러워하지 말자. 초라한 글일지라도 정성들여 쓰자.


생강 껍질은 비록 생각 없이 몸만 움직이는 단순노동인 것에 비해 글쓰기는 단순 노동은 아니지만, 반복되면 때론 단순 노동처럼 쉬운 날도 오지 않을까? 안..올..까?..

그저 생강청이라는 결과물을 상상하며 생강 껍질을 벗기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글쓰기도 일단 펜을 손에 쥐고 노트에 끄적여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꼬물꼬물 내 글씨들로 가득 메운 노트를 상상하며. 언젠간 되겠지. 가다보면 도착하겠지.

조금씩 한 톨 한 톨 생강 껍질을 벗기다 보면 어느덧 3kg도 10kg도 다 벗겨져 있겠지.



생강청 만들기 레시피

1. 생강은 물에 담가 하룻밤 불린다

2. 껍질을 벗긴 후 찬 물에 2-3번 세척한다.

3. 듬성듬성 잘라 휴롬에 착즙 한다.

4. 착즙 한 생강물을 볼에 담아 전분을 가라앉힌다. (5시간 정도 그대로 두어 전분 가라앉히기)

5. 윗 물만 따라내어 바닥에 가라앉은 전분은 접시나 쟁반에 펼쳐 두고 냉장고에서 굳힌다.

6. 배 1개를 휴롬에 즙을 낸다.

7. 팟에 전분 가라앉힌 생강물과 배즙과 설탕, 시나몬 스틱, 꿀을 넣고 약불에서 걸쭉한 농도가 될 때까지 끓인다. 설탕은 한 번에 넣지말고 중간중간 맛을 보면서 당도를 조절한다.

가라앉은 전분으로 생강가루 만들기

8. 가라앉은 전분을 냉장고에 굳혀서 믹서에 갈면 생강 전분가루를 만들 수 있다. 탕수육 소스 만들 때 사용하면 좋다.

9. 휴롬에 생강을 착즙하고 나온 찌꺼기는 건조기로 말려 믹서에 갈아 생강가루로 만든다. 각종 요리에 생강이 들어갈 때 냉동실에 보관한 생강가루를 사용하면 급하게 생강을 사러 마트로 뛰어갈 일이 없다.


한 줄 요약 : 생강 껍질을 까듯 글쓰기를 하자. 분명 몸에 좋은 생강청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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