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
옷가게를 오랜 시간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동대문 도매 상가는 제일 꼭대기층부터 접수해야 한다
경험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들은 살아갈수록 점점 더 많아진다.
그래서 노장을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월드컵 브라질전에서 안정환 해설위원은 이런 말을 했다. "축구는 경험입니다."
경험 많은 노장 선수가 무서운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일에는 경험이 스승이다.
곰처럼 시작해도 결국은 여우가 될 수 있다.
미련 곰탱이.
모든 일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들은 미련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잔머리를 써가며 요령을 부리는 것보다는 미련 곰탱이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함부로 여우짓을 하기엔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보세 옷장사를 하다 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처음 물건 사입을 하러 가면 미련한 곰처럼 몸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덩치가 큰 곰의 행동이 굼뜨고 느린 것처럼, 초보 셀러는 마음만 급할 뿐 요령이 없어 굼뜬 곰 같다.
지방에서 옷 가게를 하는 사장들은 모두 장차를 타고 사입을 하러 간다.
시장 차를 줄여 장차라 불리는, 소매 사장님들을 위한 사입 버스를 말한다.
나는 아직도 첫 사입의 그 떨림을 잊지 못한다.
혼자 장차를 타고 사입해 올 자신이 없어 남편과 우리 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갔었다.
대표적인 쇼핑의 성지 밀리오레 그 반대편으로 도매상가들이 줄줄이 있다. 이젠 DDP인가?
아무튼, 모두들 즐거운 쇼핑을 하러 동대문을 가지만, 셀러들은 먹고살기 위해 동대문에 모여든다.
그 많은 상가들 중 어디를 먼저 가야 할지 조차도 모른 채 눈에 보이는 대로 들어간다.
그곳이 어디든 언제나 1층부터 둘러보며 사입을 시작했다.
모르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사입에도 적용된다.
1층을 돌고 지하도 내려갔다가 2층도 갔다가 3층도 갔다가, 상가 건물 하나만 돌아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리가 아파온다. 헉헉.
그렇게 동선도 무시하고 코스도 무시한 채 말 그대로 무식하게 드리댄다. 몸으로 부딪힌다.
물건을 사입하면 그걸 들고 다른 상가를 가기에 힘이 드니까 그 물건을 주차장까지 가서 차에 넣어두고 다른 상가를 또 간다. (어이쿠 글을 쓰는데도 그때 생각에 헉헉거린다)
처음 몇 달을 이런 식으로 정말 비효율적이게 사입을 했다.
광주에서 동대문까지 4시간 잡고 왕복 8시간과 사입하는 새벽 시간 6시간.
그다음 날 샵을 오픈하려면 잠을 못 잔다.
말 그대로 완전 막노동이 따로 없다.
이제 어느덧 요령이라는 걸 쓸 줄 아는 여우가 되기 시작한다. 동대문 도매 시장에 익숙해질 때쯤 과감하게 장차를 탄다. 장차는 항상 디자이너 클럽 앞에 하차를 한다.
밤 10시부터 상가들이 오픈을 한다. 그 시간에 맞춰 장차가 10시쯤 동대문에 도착한다.
그리고 새벽 4시에 내렸던 곳에서 다시 출발하여 돌아온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6시간 동안 나는 동대문 도매 상가를 최대한 다 둘러보아야 하며, 그 시간 내에 원하는 만큼 물건을 해야만 한다.
한 번 두 번 동대문을 갈 때마다 점점 눈이 돌아가고 머리가 돌아간다.
장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디자이너 클럽과 그 옆으로 뉴존, 그 앞으로 유어스, 그 뒤쪽으로 퀸즈스퀘어, 벨 포스트 등 그 주변 상가를 한 동선에 다 돌고 다른 블록의 상가들을 돌기 위해 이동한다.
이동하는 길에 있는 해양 엘리시움, 디오트, 청평화를 돌고 중간 골목으로 들어가 APM과 주변 상가를 돈다.
(필자의 오래된 기억으로 상가 이름과 위치가 안 맞을 수도 있다.)
점점 단골 거래처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 사입하는 동선이 한 차례 바뀐다.
이렇게 건물과 건물을 이동하는 동선은 직접 발로 뛰어야 익힐 수 있다.
각자의 매장 콘셉트가 다르므로 누구를 따라 할 수가 없다.
동선을 익힌 후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상가 하나를 완벽하게 돌며 사입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먼저 상가에 도착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층으로 간다.
예를 들어 맨 위층이 5층이라면 5층을 지그재그로 다니며 가게에서 물건을 보고 사입을 한다.
동대문의 모든 도매 상가는 작은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길도 좁다.
사람들은 바글거리고 그 길을 빠르게 뚫고 지나가야 시간 내에 많은 상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렇게 5층 사입을 마치면 비상계단을 통해 4층으로 내려온다.
이런 식으로 꼭대기 층부터 계단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오며 사입을 하고, 다음 건물로 이동한다.
처음에 멋모르고 1층부터 위로 올라갔더니 계단으로 가긴 힘들고, 엘베를 타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리는 듯하고, 정작 물건을 보고 선택하고 거래를 하는 시간보다 이동시간이 더 많이 소비됐다.
건물 간의 동선도 정리되었고, 건물 내에서 사입을 하는 요령도 알고 난 뒤부터, 점점 사입 시간이 단축되었다. 때론 장차 출발 시간보다 사입이 일찍 끝나서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동대문은 그야말로 낮보다 아름다운 곳이다.
가끔 옷가게에 슬럼프가 왔을 때 사입을 하지 않더라도, 그 열기가 고파 일부러 장차를 타곤 했다.
축 처지던 어깨가 동대문에 도착만 하면 날개를 단 듯 활기가 생겼다. 날아갈 것 같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 바쁜 걸음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이 넘치고 생기가 돌던 곳.
이제는 그때처럼 날다람쥐도 아니고 온 건물을 휘젓고 다니며 사입할 자신도 없지만,
그곳의 열기만은 언제나 느끼고 싶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동대문도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는데 안타깝다.
경험이란 건 쓸데없는 게 하나도 없다.
나처럼 건물 꼭대기층부터 사입을 하며 내려오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별것 아니지만, 그게 곧 별게 되는 게 경험이다.
나는 이제 도매가 아닌 소매 상가를 가도 그때처럼 제일 꼭대기 층으로 간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혹시 초보 셀러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사입을 하러 동대문에 가면 엘리베이터에서 꼭!! 제일 위층의 버튼을 누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