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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책상으로

좋아하는 공간의 이동

by 그레이스웬디

몇 년 동안 가장 좋아하던 장소는 부엌이었다.

책도 아늑한 식탁에서 보고,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일기도 쓰고.


2022년 올해 5월부터 좋아하는 공간이 바뀌었다.
부엌에서 안방 책상으로.


서재도 갖고 싶었지만 나는 그릇 방이 갖고 싶은 여자였다. 둘 다 가지겠단 소리였다. (과거형)

그런 내가 이제는 코지 한 서재가 더 갖고 싶다. 지금 집에서 이사를 가야만 가능한 서재.

지금 내 집엔 내 서재로 만들 방이 없다 ㅜㅜ

남편 서재는 싫다. 그냥 거긴 니꺼야.


그래서 거실에 매우 큰 책상을 두었다. 욕심만 많아서 또 너무 큰 걸 들여놓았다.

의자에 앉아 책상 앞 끝쪽 책꽂이에 있는 책을 꺼내려면 일어서야 한다 ㅡㅡ;;;

그래도 거기서 아들과 책도 읽고 독후활동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은 거실을 서재삼아 내 공간으로 쓰려고 했는데, 코지 한 느낌 1도 없이 거실은 너무 넓고 책상은 쓸데없이 크다.

창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테이블을 두고 컴퓨터도 옮겨놓고.. 한동안 거실 테이블에서 영어공부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어느 날, 남편이 블로그 열심히 하라고 사준 맥북이 생긴 뒤로는 거실 테이블의 컴퓨터를 안 쓰게 되었다.

ios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더 이상 윈도우가 편하지 않다.


노트북을 거실 테이블에 두고 거기서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아주 작은 나만의 공간이 갖고 싶어졌다.

집을 둘러보아도 작은 공간이 없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닌 데다가(옛날 건물이다) 평수가 넓어서 방들도 다 큰데, 더 이상 여유 있는 방도 없다.

그렇다고 옷방 한쪽에 책상을 두는 건 쫌 아니지 않나. 나는 꼭 나만의 공간이 갖고 싶었다.


여기저기 구상을 하다가 찾은 공간.

바로 침대방이다. 안방은 퀸사이즈 침대를 두 개 붙여 패밀리 침대로 아들과 내가 둘이 굴러다니며 잔다.

남편은 코를 골아 내쫓은 지 벌써 2-3년 ㅋㅋㅋ

안방에는 붙박이 장과 책장 2개와 퀸사이즈 침대 2개, 화장대가 있다.

책상이 들어갈 자리라곤 정말 코딱지만 한 자리밖에 남지 않는다.

붙박이 장 이불장에서 자주 쓰는 이불들을 옆방으로 옮기고 문을 잘 열지 않는 용도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작은 책상을 갖다 놓았다.

이제 어쩌다 끝 쪽 붙박이장 문을 얼라치면 의자를 빼야 한다. ㅋㅋㅋㅋㅋ

정말 딱! 의자에 내가 앉으면 그게 전부인 공간이다.

대충 이렇게 쓰다가 이사 가면 서재를 멋지게 꾸며야지 생각하며 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보다 더 아늑할 수가 없다.

아주 좁은 공간, 그 자리가 주는 편안함.

이 공간이 생긴 후로 나는 안방에 틀어박힌다. 밖으로 나가기가 싫을 정도다.

부끄럽지만 내 공간이다 ㅎㅎㅎ

책상 앞으로는 침대가 있고 책상 뒤로는 붙박이 장이 있다.

그 사이의 공간에 딱 책상과 작은 의자 하나만 들어간다. 의자도 컴퓨터 의자 같은 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식탁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창가라 새벽에 창문을 열면 새벽 공기를 바로 맡을 수 있다.

바람이 차니 담요를 걸칠 수 있게 의자 위에 깔아 두었다.

낮이면 햇살이 이 창을 통해 내 책상 가득 퍼진다.

비가 오면 바로 옆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잘것없고 작은 이 공간에 내가 이토록 만족할 줄 정말 몰랐다.

남편은 내 식탁의자를 걱정한다. 글을 쓰기엔 불편한 의자라고. 공간이 좁은데 굳이 거실 책상을 두고 거기 낑겨앉아야겠냐고 ㅋㅋㅋ

남편은 절대 앉을 수도 없는, 말 그대로 나만의 공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아 아들만 빼고 ㅜㅜ 나의 아들이 호시탐탐 이 공간을 노리고 있다. ㅋㅋㅋ


이 작은 책상에도 들어갈 건 다 들어간다.

작은 원목 책꽂이도 3개나 놓을 수 있고, pen심 가득한 내가 양껏 펜을 꽂아놓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말 새벽마다 여기 앉아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는 게 너무너무 행복하다.

이 방을 나가면 곳곳마다 화려하고 넓지만, 나는 이 초라하고 작은 공간이 가장 편안하고 좋다.

내가 이렇게 심플한 사람이었던가.

유배지 허름한 곳에서 그토록 많은 책을 써낸 다산님이 왜 생각나는지? ㅎㅎㅎ

나도 이 작은 공간에서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야겠다.



글쓰기를 마음먹었을 때, <나도 한 문장 잘 쓰면 바랄 게 없겠네>라는 책에서, 글을 쓸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라고 했다. 베란다 한켠도 좋고, 거실 한쪽, 방의 구석 등 크지 않아도 글 쓸 책상 하나만 들어가면 되는 그런 나만의 공간을 만들라고.

만들어놓고 보니 딱 내 공간이 책 속에서 말한 그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새집처럼 예쁘고 깔끔하게 인테리어를 하고, 화려하고 럭셔리한 공간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공간을 보니 나는 역시 빈티지하고 아기자기하고, 럭셔리보단 코지 한걸 더 좋아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면서 '나'에 대한 마침표를 하나 더 찍어낸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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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하루 종일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창틀에 인센스 스틱 홀더를 두고 불을 붙여놓고, 나지막이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도 좋고, 글을 써도 좋은 공간.

이렇게 큰 안방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라며 저절로 감사일기를 쓰게 되는 공간.

나는 지금 여기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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