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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이

나이 미상

by 그레이스웬디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러운 당신은
눈처럼 맑은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언제나 맑고 깨끗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고등학교 때 화실에서 만난 다른 학교를 다니던 남자 사람 친구.

H는 내 생일 때마다 이 노래를 나에게 불러주었다.

내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나를 못 만나던 때는 카드에 적어주기도 했고,

점점 친해져서 내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던 때는 친구들과 합창으로 불러주기도 했고,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통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었다.


늘 나의 보디가드 같았던 그 애가 나를 8년이나 짝사랑한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배신감을 느꼈고,

그 아이가 불러주었던 그 많은 '겨울 아이'가 왜인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참 그 아이가 좋았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평생 진한 우정으로 끝까지 갈 거라고 믿었었는데

나는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너는 왜 나를 좋아하는데, 그냥 친구로 지냈으면 안 되는 거였냐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를 매몰차게 버렸다.

우리의 우정이 12년이 되었을 때였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후회가 가득했던 내 젊음을 붙잡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다시 되돌리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내가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그 아이를 그렇게 버리지 않겠다고.

언제나 11월 30일이 되면 나는 그렇게 그 아이의 통기타와 묵직한 그 목소리가 그리워지곤 한다.


H에게 - 이젠 너도 나도 나이가 아주 많아서 그때의 우리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도 중년이 되었구나. 중년의 너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 여전히 댄디할 거야.

너의 인성과 너의 배려심과 너의 따뜻한 눈길들로 너의 삶을 잘 만들어 냈을 거야.

아이는 몇 명이니? 널 닮은 아들이라면 너처럼 그렇게 신사의 품격을 지녔겠구나.

딸이어도 좋겠다. 널 닮았다면 무척 예쁠 거야.

너의 배우자는 잘해주니? 나처럼 못되고 제멋대로인 여자는 분명 아닐 거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너무 네 마음을 짓밟았어..

오랜 시간이 지나 넌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네가 결코 잊지 않을 거란 걸 알아.

누구나 12년의 세월을 잊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난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알잖아 사람 마음이란 게, 뭐가 한 커플 씌면 그 마음은 원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너의 마음이 나는 두려웠던 거야. 이해하겠니?

너를 찾으려고 참 많이 애썼던 나의 지난날을 고백할게.

넌 뭐하고 사는데 도무지 sns에서도, 너의 동문 밴드에서도 널 찾을 수가 없는 거니?

혹시 한국을 떠난 거니?

몇 년 동안 너를 찾다가 포기했어.

네가 아마도 꽁꽁 숨어버렸다고, 내가 널 찾지 못하게..



나이가 든다는 건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들 한다.

나이는 누구나 들어가는 것이니까. 그래도 나는 자꾸만 서글퍼지고 안 믿어진다.

억울하다고는 말 못 한다. 다만 내가 조금 일찍 이 세상에 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래도 자꾸만 조금만 더, 5살만 더 10살만 더 젊었으면 좋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렇게 5살, 10살을 조금씩 뒤로 물려 '겨울 아이'를 만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내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라는 둥, 하늘의 뜻을 알아차릴 나이라는 둥. 그딴 건 다 개소리다.

그냥 살다 보니 어느덧 지금의 나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40대엔 이렇게 될 거야. 혹은 이런이런 모습으로 살아야지 라며 꿈을 꾸고 계획은 하지만,

그건 살아봐야 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는 모습이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더라도 그 사람의 삶을 비난하거나 깔보아선 절대 안 된다.

누군들 대충 그럭저럭 살고 싶겠는가. 누군들 잘 살고 싶지 않겠는가.

내 나이가 되어보니 그저 남에게 욕 안 먹고, 피해 주지 않으며 사회라는 무리에 잘 섞여 살기만 해도 인생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젊은 날엔 그렇게 싫었지만, 사실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레벨이라는 것을 살다 보니 깨닫게 된다.

이룬 것이 얼마든, 가진 것이 얼마든 사실 그건 인생이라는 커다란 프레임 속에선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있어도 봤고 없어도 본 사람으로서 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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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나이를 티 내지 않고 '저 사람은 도대체 몇 살일까?' 궁금해지도록 나이 미상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나의 젊은 날을 가끔 그리워하면서, 생일만 되면 생각나는 '겨울 아이' 같은 추억 가득 만들어가면서,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나이를 먹고 싶다.

통장의 잔고보다, 가지고 있는 부동산의 개수보다

추억 한아름 가득 안고 살 수 있게.


나는 오늘 '겨울 아이'를 들을 수 있을까.
사실은 몇 년 전부터 '겨울 아이'를 듣지 못했다.
이번 생일은 유난히 듣고 싶어 진다. 왠지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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