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지는 밤에
《공주가 사랑한 선비》 제2부 제2장. 매화 꽃 지는 밤에
죽산안씨 종가의 대청 끝, 붉은 등롱 아래. 저녁 기운이 마당 끝으로 스며들던 시각, 안씨 문중의 부인들은 대청 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마당 끝 한켠에 조용히 서 있는 한선의 그림자 위로 스쳤다.
“안됐지… 저 규수가 먼저였는데.”
“어릴 적부터 혼처로 정해두었다더만...”
“공주도 곱지만, 저 규수도 못지않네…”
말은 나즈막했고, 등불 아래 그림자처럼 흘러갔다. 말 끝은 매번 조용히 사라졌다. 조심스러운 그들의 시선은 매화나무 아래 그림처럼 서 있는 한선에게 감히 머무르지 못했다.
안채에서는 안주인 허씨부인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한선의 모친인 박씨부인이 하례를 했다.
“부인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허씨부인은 눈을 피하면서도 한선에게 마음이 쓰였다.
“미안한 마음이라도 전하려 했는데... 내내 보이지 않는군요.”
“지금쯤 화장이 다 망가졌을테니... 혼자 두십시오.”
박씨부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 고운 아이… 며느리로 들이길 바랐는데...”
허씨부인은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왕실 혼사를 어찌 막겠습니까.”
박씨부인의 목소리엔 묵은 체념이 섞여 있었다. 말이 끊기고, 찻잔만이 조용히 비워졌다. 바람이 연등을 흔들었고, 붉은 불빛이 마당의 어둠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혼례가 끝난 뒤, 사랑채 뒷담 쪽 복도 끝에서 안망지와 한청천이 서로를 마주 했다.
“숭정공, 혼례식날에 축하가 아니라 사죄의 말을 드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망지가 조용히 말했다. 한청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씨 문중의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다만, 딸의 아비로서…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더 일찍 맺어주지 못한 제 탓이오.”
“올봄에 혼사를 진행할까 하던 차였는데… 대왕께서 기재를 한눈에 알아보실 줄이야.”
안망지는 눈을 떨구며 씁쓸히 웃었다.
“그저 죄송할 따름이오. 그 아이… 잘 다독여 주시구려.”
한청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가 그러더이다. 재주는 모자라도 기개가 높은 이를 알아봐달라고. 허나 조선팔도에 왕실 혼담을 거절할 가문이 어디 있겠소.”
안망지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순흥에 백강공이 있지 않소.”
그 이름에 한청천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백강공. 말에서 떨어진 선왕의 사냥까지 사초에 기록했던 인물. 그 곧은 기개로 임금에게조차 사정을 받았으나, 결국 기록을 굽히지 않아 왕실의 미움을 샀던 자. 예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끝내 관직을 버리고 순흥에서 후학을 가르친다는 소문만이 돌았다. 늘그막에야 겨우 자손을 보아서 엄히 가르친다고 했다.
“그 분의 자제라면, 우리 선이의 마음도 위로받을 수 있을 듯싶소.”
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한청천은 한선의 거처 마루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딸의 방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선아.”
문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부르자,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듣고 있습니다."
"우리 뜻 대로 세상 일이 되지 않는구나."
"소녀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한청천은 잠시 침묵했다. 이내 낮게 말했다.
“질서란, 지키는 자에겐 늘 아픈 것이다. 그래도 대왕께서 세우는 질서는 공화를 위한 것이니…”
“그래서 더 서글픕니다. 아름다운 질서에 짓밟히는 것은 더 잔인하니까요.”
그 말에 한청천은 가슴이 저며왔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에게 다친 마음을, 어찌 다 어루만지겠냐만은...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자."
"잊어 보겠습니다."
"순흥 땅, 백강공의 집안에 혼담을 넣겠다. 예문관 사관때 기개 하나만은, 조선 팔도에 으뜸이셨느니라.”
정적 가운데 바람이 매화 한 송이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한선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렸으나, 담담했다. 그러나 한청천이 자리를 뜨자, 문에 비치는 그녀의 그림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은 사냥 중 낙마 사고를 겪었으나, 이를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관은 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