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으로 관계맺기

우연히 만난다는 것

​제4장. 만남의 우연성과 기적

​1. 인연이라는 사슬, 우연이라는 해방


​게슈탈트 기도문의 네 번째 문장은 관계 맺기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통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혁명적인 문장입니다.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and if by chance we find each other, it's beautiful)."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라는 부분은 만약 우연히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으로도 많이 번역됩니다. '발견'이라는 단어는 '만남'의 우연성이라는 본질을 통찰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된 문장의 백미는 단연코 우연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사랑과 관계를 설명할 때 우연보다는 운명이나 필연이라는 단어를 숭배해 왔습니다.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라는 수사는 달콤하지만, 구조적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두 사람을 옭아매는 무거운 사슬입니다.
​필연은 자유를 삭제합니다. 만약 두 사람의 만남이 거부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나 전생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면, 그 관계 안에는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자유가 아니며, 자유가 없는 곳에는 책임도, 진정한 기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필연으로 묶인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구속하는 의무가 되거나, 관성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지루한 부채 상환 과정이 됩니다.


​프리츠 펄스는 이 문장을 통해 관계를 닫힌 운명의 방에서 꺼내어, 광활하고 불확실한 우연의 대지 위로 해방시킵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궤도를 돌던 두 행성이 그 광막한 시공간 속에서 찰나의 순간에 교차할 확률은 수학적으로 0에 수렴합니다.
​펄스는 이 희박한 확률, 즉 불확실성이야말로 만남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가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규정할 때 상대는 당연한 소유물이 됩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사람', 혹은 '언제든 궤도가 달라지면 멀어질 수 있는 타인'으로 인식할 때, 지금 이 순간의 마주침은 기적(Miracle)으로 격상됩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두 존재가, 자발적인 의지로 머무름을 선택했을 때, 그 관계는 가장 강력한 실존적 생명력을 획득합니다. 우연은 불안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의무에서 해방시켜 예술로 만드는 마법의 가루입니다. 매 순간이 일생에서 단 한 번 뿐인 소중한 만남이 됩니다. 이것은 센노 리큐의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 됩니다.

​2.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우연의 미학을 가장 잘 포착한 작가는 밀란 쿤데라입니다. 그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독일 속담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를 인용하며 인간의 삶과 만남이 가진 일회성과 우연성을 탐구했습니다.


​니체의 영원 회귀(Eternal Return) 사상에서 모든 것은 무한히 반복됩니다. 반복되는 것은 무겁습니다. 만약 우리의 만남이 전생부터 내생까지 영원히 반복되어야 할 필연이라면, 그 만남은 끔찍한 짐이 될 것입니다. 반면, 쿤데라는 우리 삶이 리허설 없이 단 한 번만 공연되는 연극과 같다고 말합니다.
​펄스가 말한 우연히는 바로 이 일회적이고 가벼운 속성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필연의 짐을 벗어던진 두 영혼이, 마치 우연히 날아든 나비처럼 서로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그 순간은 무겁지 않기에 자유롭고, 필연적이지 않기에 경이롭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너무 무겁게 만듭니다. "너 없으면 못 살아", "우리는 영원해야 해"라는 말들로 서로의 발목에 쇠구슬을 매답니다. 기도문은 그 쇠구슬을 끊어버립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그래서 이 순간이 소중하다." 이 가벼움이야말로 서로를 질식시키지 않고 숨 쉬게 하는 산소입니다.


​3.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부수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현미경을 들이대야 할 단어는 발견(find)입니다. 이 미세한 동사의 의미 속에 관계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태도의 차이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나그네가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늘려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 만남의 태도입니다.
​많은 현대인이 관계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이상적인 연인', '이상적인 배우자', '이상적인 자녀'라는 침대를 만들어 놓고, 실재하는 타인을 그 틀에 끼워 맞추려 시도합니다.
"너는 좀 더 야망이 있어야 해."
"옷을 그렇게 입지 마."
"내 방식대로 사랑해 줘."


​이것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원재료 삼아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조각상을 만드는 폭력입니다.

하이데거는 기술 문명이 대상을 닦달하여 에너지원으로만 취급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내 입맛에 맞게 개조하려 할 때, 우리는 상대를 인격체가 아닌 자원으로 닦달하는 것입니다.
​반면 발견(find)은 탐험가의 태도이자, 하이데거가 말한 내맡김의 태도입니다. 숲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꽃을 보듯,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탐험가는 꽃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페인트칠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개조하려는 욕망을 멈추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로 전환할 때, 비로소 오해가 걷히고 진실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나는 나다"를 선언함으로써 확보된 나의 시선으로, "당신은 당신이다"라고 선언된 타인을 바라볼 때 발견이 됩니다.


​4. 마찰과 불꽃
​게슈탈트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한 만남(접촉)입니다. 그렇다면 펄스가 말하는 만남(접촉)이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접촉이 일어나려면 두 물체가 서로 다른 경계를 가진 고체 상태여야 합니다. 흐물흐물한 액체 상태에서 만나면 섞이거나(융합), 흡수될 뿐입니다.
​융합된 관계, 즉 경계가 없는 관계는 액체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마찰이 없습니다. 마찰이 없으면 열도 나지 않고, 불꽃도 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야"라는 환상 속에 있는 커플들이 권태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단한 고체로 자립한 두 자아가 부딪칠 때, 비로소 맑은 타격음이 울리고 불꽃이 튑니다. 펄스가 말한 '아름다움'은 평온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우주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이 역동적인 불꽃입니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I am I) 너를 만나는(find You) 것. 이 고난도의 기예가 성공하는 순간을 펄스는 '아름답다'라고 표현합니다.


​5. 릴케의 두 고독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 주고, 경계를 그어주고, 맞이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게슈탈트 기도문의 네 번째 문장에 대한 가장 완벽한 주석입니다. 융합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를 고치려 하지 말고, 우연히 마주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맞이하라.


우리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만남의 본질적 의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모든 만남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불완전한 만남의 완성이란 바로 "어쩔 수 없음"이라는 스토아적 지혜입니다. 이 냉정한 만남의 미학이 어떻게 우리의 실존을 완성하는지, 그 마지막 여정으로 떠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