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유달산의 유자가 바뀌는 역사의 이면을 다루는 소설이다.
유교에는 경전 중심의 교종과 달리 고대 원시유교의 능력을 다루는 심종이 전승된다. 유교 심종은 유교경전 대학에서 말하는 명명덕의 능력 즉 밝고 밝은 견귀염핵의 안력으로 사방을 주유하며 괴력난신을 예악으로 돌리는 자들이다.
유교 심종의 정명사는 문자로 제례를 올리는 자들이다. 문자로서 귀신을 예악으로 돌린다. 정명 즉 바른 이름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들을 규정한다.
심종 정명사의 예악이란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정할 뿐 아니라
규정하는 것으로 강력한 주술이 된다.
제례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른다.
상례로써 산자를 죽게 하며
혼례로써 서로 다른 혈족을 묶는다.
정명사인 현옥은
향교 수령인 도유사로부터
향찰(향리감찰) 임무를 받고 유달산으로 향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연루자인 정안조와 관련된 임무다.
정안조는 유배 중 고종임금 승하로 풀려나 유타라 산에서 시회를 열었다.
분개한 유생들은 이미 정안조 살해를 결의하고 움직이는 중이다.
친일 기관이 된 관에서는 주시 중이다.
곧 지방유생뿐 아니라 향교까지 뿌리 뽑힐 것이다.
이로 인한 괴력난신이 들끓고
유타라에 봉인된 힘이 풀리면
지역유생들에게 살겁이 닥칠 것이다.
향교 도유사는 정안조 하나 죽이는 수준이 아니라
천지자연을 가르는 제례를 결행하고자 한다.
정명사인 현옥은 문자로서 유달산에 제례를 올려
신화의 시대를 끝내고 문화문명시대를 선언한다.
비로소 유타라를 유달로 가른다.
유달산 발음은 같지만 한자를 유교 유자로 바꾸어서 신화를 인간문명으로 돌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타라에 봉인된 보현자가 순순하지 않다.
유교심종사와 보현자의 갈등은
고대 상고사로 올라간다.
이제 내가 소멸하면
누가 학을 지켜보게 할 것인가
모두가 지켜보게 하겠다.
그것이 바로 대학루다(학을 기다린다)
향교에서 목포 유달산을 상징하는 정자를 세워
정안조의 폐악으로부터 비롯된
유타라의 괴력난신을 잠재운다.
그리고 관청에 그 힘이 다한 고종의 향찰령을 보이고 유달산의 이름을 가르는 것을 완성한다.
마침내
1993년 3월 1일 반민족연구회는 문자로서
정안조에게 친일파라는 상례를 올려
역사의 죽은 자가 되게 하다.
정안조 실존 친일파(이름 중간자 변경)
****2차 자료***********
이름은 주술이 된다.
향찰에 유교 심종사나 정명사들이 소속되어 사방을 주유하며 괴력난신 이매방량을 견귀염핵하여 예악으로 되돌리는 일을 비밀스럽게 전승한다.
향찰패나 향찰령 등 향찰의 권한 조직 수장 체계 소집 관청
그 기능 중 풍속단속에서 그 기능이 정명사의 이름으로 문자의 제례를 올리는 등 사방을 주유하며 향리의 괴력난신을 예악으로 돌리는 향리를 감찰하는 것을 향찰이라고 한다.
참고
고려 때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각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보내 인재들을 교육하게 한 것이 시초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기능이 강화되어 조선 성종 때에 전국 모든 군, 현에 향교가 설치되었습니다.
향교가 세워진 목적은 인재를 길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관리를 키우고 고려 시대의 불교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유교를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세우기 위해 이를 전파하고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향교의 기능 조사
향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첫째로 유교 예절과 경전을 배우는 교육의 기능
학생들은 서당에서 나아가 향교에서 중등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유교 교육을 받게 되고, 시를 짓는 사장학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을 배우며 교재는 '소학'과 '가례', '사서오경', '근사록' 등을 사용했으며 수업 방식은 개별로 독서한 것을 읊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향교는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기능을 했습니다.
향교마다 모시는 위패는 다르지만 주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음력 2월과 8월 중 좋은 날을 골라 '석전대제'를 지냅니다. 이처럼 향교는 유학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유학의 상징적인 장소였으며, 유학의 이념을 알리는 중심지 기능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향촌 기구로서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는데, 백성들을 취조하거나 유교 예절을 잘 지킨 이의 포상을 건의하는 등의 방식으로 고을의 풍속을 단속하였고 또 아이나 부녀자를 대상으로 강습을 열거나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모아 상소하는 장소가 되어 여론 형성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향교의 교수진과 학생
향교의 교수진은 크게 교관, 교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교관의 경우 조선 초기에 향교로 파견된 종 6품의 교수 72명과 종 9품의 훈도 257명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이 중앙 행정 관료로 가는 것을 선호하고 지방 교관으로 가는 것을 기피하였습니다. 또한 사원의 발달로 인해 점차 향교의 교육기능이 쇠퇴함에 따라 영조 때부터는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지 않았고, 때문에 향교는 교임이라 불리는 지방 양반들로 구성된 교수진을 만들어 학생들을 교육해 왔습니다.
향교의 학생들은 교생이라 불렀으며, 조선 초기의 향교 입학 조건은 16세 이상 40세 미만의 평민 이상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추천과 시험을 통해 입학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학생들이 대다수 양반이었으나,
16세기 이후 양반의 자제들이 대부분 서원으로 가게 되면서, 향교의 학생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향교에 입학하게 되면 소과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며 소과의 초시와 복시에 모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될 수 있었고, 또한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어 이를 위해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향교의 배치와 구성
향교의 배치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의 위치에 따라서 전묘후학과 전학 후 묘 배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묘후학 배치는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형태로 향교가 평지에 있는 경우 이러한 배치를 이룹니다. 반대로 전학 후 묘 배치는 명륜당이 앞에 대성전이 뒤에 있는 형태로 향교가 경사진 곳에 위치할 때 주로 나타나며, 우리나라 향교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밖에도 대성전과 명륜당이 나란히 배치하는 병렬식 배치구조도 있는데, 이러한 배치구조의 향교는 경상남도의 일부 향교에서 찾을 수 있으며,
향교는 크게 대성전, 동무와 서무, 명륜당, 동재와 서재로 나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향교의 규모에 따라서 모시는 인물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앞쪽 좌우에 있는 공간으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입니다. 위패의 수에 따라서 규모가 다양하며, 경우에 따라서 동무와 서무를 짓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공간으로 조선 후기에는 교육 기능이 점점 약해지고 지역사회를 위한 상징적인 공간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 주로 제사를 지낼 때 제관들이 대기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숙식과 공부를 하는 장소인데, 동재는 상급 유생이 사용하고 서재는 아래 유생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외에는 제기를 관리하는 제기고, 교재를 찍어내거나 목판을 관리하는 경판고, 관리인이 사는 교직사 등이 있습니다.
향교의 쇠퇴
향교는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달과 향교 교육에 대한 양반들의 외면, 교육적 효과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쇠퇴되어 갔는데, 정부의 재정 궁핍으로 인해 지원감소 및 전쟁으로 인한 건물 소실, 인재 부족등의 문제가 이어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을 잃고, 제향기능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향교 중심의 유교 제도와 향촌 풍속 단속 기능
향교의 조직 구조와 교관·교임 체계
조선의 향교는 각 군·현에 설치된 관학(官學)으로, 향교장의 관리 아래 **교관(敎官)**과 교임(校任) 체계로 운영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향교의 교관은 교수(敎授, 종 6품)와 훈도(訓導, 종 9품)로 구분되는데, 초기에는 과거급제자나 지방 유생을 임시 교관(학장·교도)으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교관 직책은 기피 현상이 심해, 태종·세종 때 유인책과 논공행상을 도입했음에도 근본적 해결은 어려웠다. 결국 영조대 『속대전』 개정 때 향교의 모든 관료적 교관이 폐지되어 교관직이 사라졌고, 이후 유능한 유생들은 하향식 학교인 향교 대신 사액서원·사학·서당 등으로 몰리게 되었다.
한편 교임(校任) 은 향교의 학생(교생) 자치조직에 선출된 대표들로서, 향교 운영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교임은 크게 도유사(都有司), 장의(掌議), 유사(有司)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도유사(別호 당장·교장·재장)는 교임의 우두머리로서 향교의 전반적 업무를 총괄하였다. 장의는 수장의·부장의 두 사람으로 향교의 일상 운영을 담당했으며, 유사는 직책에 따라 여러 명이 뽑혔다. 교임 선출은 향교 교생 회의에서 후보를 추천하면 수령이 최종 임명하는 절차로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회의 추천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향교는 국가가 설립한 학교로서 관료적 교관과 현지 유생의 자치조직(교임) 체계가 공존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 교관 파견이 중단되자 향촌 유생 출신의 교임들이 향교 운영의 주역이 되었다.
향교의 풍속 단속 및 감찰 기능
향교 자체에 법적 감찰 권한은 없었으나, 향교를 둘러싼 유교적 조직들은 향촌 풍속 교정에 관여했다. 조선 초기에 지방 양반들은 유향소(留鄕所)를 조직하여 향리를 감찰하고 부패·풍속 문제를 시정하려 하였는데, 이는 국초의 중앙조직 확립 전까지 토착 지배세력의 자발적 운동이었다. 이후 중종대 사림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여씨향약 등 유교적 향약을 보급하여 향촌 풍속 교정에 나섰다. 향약(鄕約)은 주로 향교나 서원 등 유림 기반의 조직을 통해 주민에게 전파되었으며, 주현향약은 면·리 단위로 향교 조직까지 활용하여 전 주민의 참여를 의무화하였다.
향교 자체는 예배(禮拜)와 강학을 통한 교화 기능으로 풍속 교정에 기여했다. 향교의 문묘(文廟)에서는 공자 등 성현에게 제향(祭享)함으로써 백성에게 예의(禮義)와 충효(忠孝)의 덕목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문헌에는 “백성들은 배부르고 따뜻한 것만 귀중한 줄 알고 예의와 충효가 그것보다 중요함을 알지 못하니 가르치지 않으면 옳지 못하다”는 인식 하에, 문묘에서 예악과 교화를 일으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향교 제례는 기본적으로 의례를 통한 교육·교화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미신·무속(怪力亂神)적 풍조를 교묘히 예악(禮樂)의 질서 속으로 수렴시키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지방 유림과 향교 당국은 제향(祭享) 등 공식 의례 외에도 《소학》이나 《여씨향약》 등을 낭독하며 회향 전(會鄕典)·행향례 등을 통해 성리학적 규범 준수를 권장하였다. 향교의 직접적인 단속 사례는 기록에 적지만, 이처럼 향교의 예절 교육과 향약 운동은 전반적으로 향촌의 유교적 풍습을 강화하고 비유교적 관행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향교의 제향 기능과 문자의례의 상징성
향교는 유교식 제례(文廟祭禮)의 중심지였다. 향교 문묘에 봉안된 공자·안자 등 성현의 위패에 대한 제례는 향교 연중 주요 행사였다. 예를 들어 매년 정월과 팔월 정일에 거행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성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유교 질서를 다짐하는 의례로, 향교 교임·교생·향리(鄕吏) 등이 참여하여 집례 하였다. 또한 10월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로 지역의 노덕 있는 어른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며 예법을 교육했고, 향사례(鄕射禮)·양로연(養老宴) 등의 의례도 시행되어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향교 제례는 엄격한 서면 예식과 제문(祭文)을 통해 진행되어 그 구조 자체가 유교적 상징을 담고 있었다. 예컨대 향교 문묘 앞에는 반드시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누구나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교의 근원을 상징하는 문묘는 신성하고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즉 하마비로 문묘 진입 전례를 의무화함으로써 유교적 예(禮)를 시각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제례 집례에서도 편성된 관료(헌관·집사) 명단과 절차가 서책으로 정리되었는데, 석전제에서는 군현 수령이 초헌관(初獻官), 향교 교임 대표가 종헌관(終獻官) 역할을 맡았으며, 하헌관(亞獻官)에는 동재 유생 또는 지역 유지가 임명되었다. 이처럼 계층·신분이 명시된 엄격한 의례 구조는 예악(禮樂)을 통해 신분 질서와 유교 윤리가 구현됨을 드러낸다. 문자의식으로 치러지는 이들 향교 의례는 불교·무속 의례와 달리 문자(글)와 음악(악장)에 의존하여 질서를 유지하였으므로, 상징적으로도 혼란·무질서한 ‘괴력난신’을 합리적 예악 속으로 수렴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향교와 수령·유림·향약의 권력관계
향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현감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관)이 군현의 대표 겸 헌관(獻官)으로 예식에 참여하고, 사액(賜額)된 관학인 만큼 수령이 향교 예·교육 전반에 관여했다. 실제로 군현 수령은 매년 석전 등 제향 행사의 주관자였고, 향교 교임 선출 시 회의 추천자 가운데 최종 임명권을 가졌다. 반면 향촌 유림(재지 사족)은 향교를 향촌 지배의 기반으로 삼아 자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향약(鄕約) 운동이 확산되면서 주현향약과 같은 제도가 향교 조직을 활용하여 실시되었는데, 주현향약은 향교 조직을 통해 시행대상을 면(面) 단위로 편성하고 전 주민의 참여를 강제하였다. 즉, 향약의 포상을 통해 선·악 행위를 규제하고 상하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권력은 향교 조직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수령과 유림의 권한이 때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중기 이후 향촌 양반들은 향교 모임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여 지방관에게 건의하거나 상소하는 활동을 벌였는데, 이는 행정권을 쥔 수령과 향촌 사족 간 협의·갈등을 동시에 반영한다. 예를 들어, 후기로 올수록 새로 부농·부지층이 된 신향(新鄕) 양반도 석전제 같은 의례에 적극 참여하여 향촌 내 신분을 인정받으려 했고, 때로 서얼(庶孼) 계층의 예식 참여 요구가 기존 양반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듯 향교는 명분상 관학이지만 수령·향약·유림이 얽힌 복합적 네트워크의 현장으로 기능하였다.
향교의 쇠퇴와 향촌 여론 형성 기능의 변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국가 차원의 향교 교육 지원이 줄어들고 향촌 양반의 학문 열망도 변화하면서 향교는 점차 쇠퇴했다. 영조 23년(1747) 『속대전』 개정으로 모든 관급 교관이 폐지되었고, 유생들은 서원·서당·정사 등 사립 학원으로 학구를 옮겼다. 이와 함께 향교의 강학(講學)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지만, 대신 향교는 향촌 예식의 주관처로서 위상을 굳혔다. 조선 후기 향교 석전제 참여는 향촌 내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매 제향 때마다 교임 선출·상소·통문 작성 등 행사가 곁들여져 새로운 사회문제를 여론화하는 무대가 되었다. 실제로 향교에서는 서재·동재 유생들이 모여 지역 현안과 백성 생활을 논의하고, 그 결과를 통문(通文) 형태로 중앙 관학이나 다른 향촌 유생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여론 수렴 활동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상소로 제기하거나 직접 한양 상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향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원래 역할은 작아졌지만 향촌 여론 형성의 장으로 전환되었다. 향촌 양반들은 석전제, 향음주례 등을 통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동시에 향약·정부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였고, 부농·신흥 양반들도 향교 참여를 통해 정치·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 향교는 예식과 의례를 중심으로 향촌 유림을 결집시키고 여론을 결집·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정치·사회적 논의를 주도하는 플랫폼으로 변모하였다.
‘향찰’ 설정의 서사적·역사적 정당성 검토
위의 고증을 종합하면, ‘향찰’이라는 설정이 부여받은 기능은 크게 두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향교가 향촌 풍속을 단속하고 지역 사회를 감찰하는 역할은 부분적으로 역사적 근거가 있다. 조선 시대 유림은 실제로 향교와 향약 등을 매개로 향촌에 유교적 규범을 전파하려 했으며, 관아의 권위와 협력하여 민생·풍속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향교 제례는 주민 교화 수단이었고, 향약을 통한 마을 규약 역시 향교와 밀접히 연계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둘째,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유교 예악으로 돌려 마을의 액을 막는다는 내용은 전형적인 역사적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교 관념에서 ‘괴력난신’은 공자가 이야기하지 않은 분야로 간주되며, 조선 유학자들은 주로 교육·의례를 통해 미신을 억제하려 했다. 즉, 향교가 실제로 무당이나 귀신을 퇴치하는 의식을 주관했다기보다는, 의례와 강론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교화하며 자연스럽게 미신적 행태를 억제했다 볼 수 있다.
‘향찰’이 유교 「정명(正名) 사상」을 언급하는 것은 다소 이색적인 설정이지만, 유교에서는 예악을 통해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명칭(위상)을 바로잡으려는 전통적 사상이 있다. 따라서 서사적으로는, 향교 제례와 문자의식을 통해 지역사회의 무질서함을 교화하고 백성을 계도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결론적으로, 향교의 교육·제향 기능과 향촌 영향력은 『실록』 등 사료에 잘 나타나므로 『향찰』에서 이 기관이 지역사회를 이끄는 배경 설정은 충분히 정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