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鍮達 傳奇) #1 정명사

문자의 제례

by 회안림

하늘은 납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남녘의 끝자락까지,

고종황제의 죽음에 얽힌 석연찮은 소문이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그날 밤, 달은 붉었고, 바람은 종이처럼 얇았다.

구름은 흙빛으로 깔렸으며, 땅은 무언가를 숨기듯 묵직하게 울렸다.

길을 잃은 학이 산등성이를 돌다,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정안조가 돌아왔다.

십 년 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된 자.

이제는 반백이 성성한 얼굴로, 다시 관복을 입고 유달산 바위 위에 좌정해 있었다.

관복이 말해주는 것은 단 하나, 그의 권력에 대한 갈망이었다.


시회는 끝났고, 시인묵객들은 술에 취해 몸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향기로운 술은 미적지근했고, 벼루의 먹은 말라붙어 있었다.

정안조는 술잔을 들어 벼루 위에 부었다.

술을 머금은 먹냄새가 공기를 밀어냈다.

붓끝이 술에 젖자, 침묵이 더욱 깊어졌다.


"십 년 유배를 해보니…"

그의 목소리는 유연하면서도 쇳소리를 품고 있었다.


"붓을 쥔 자들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더이다."

그는 옥잔을 바위에 떨어뜨렸다.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가르며 퍼졌다.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붓을 쥐고, 새 조선을 써보려 하오."


시인묵객들이 한목소리로 화답했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정안조는 흡족히 웃었다.

그들의 눈동자 안에서 그는 조선의 몰락을 보았고,

그 몰락이 남긴 공백을 스스로 채우리라 결심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붓으로 유배되었고,

붓으로 유배지를 견뎠다.

붓은 칼이었고, 권력이었다.

세상을 가르고, 생사를 나누는 칼날.

이제 그는 다짐했다.

자신의 이름은 오직 자기 손으로만 써야 한다.

어떤 충의의 붓도, 유림의 붓도, 다른 붓 따위는 필요 없다.


정안조의 원한은 깨어서는 안 될 존재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산상시회를 열면서 한편으로는 그 힘을 깨우려 한 것이다.


유달산, 본래의 이름은 유타라산(鍮達山).

노을이 질 무렵, 황동의 쇳물이 흘러내리는 형상을 닮았다고 했다.

이 땅에 봉인된 힘은, 보는 자 누구나 숨죽이게 만드는 기세였다.


그 시각, 목포 향교의 후원.

이끼 낀 돌계단과, 바람도 닿지 않는 등나무 덩굴.

흔들리는 작은 등잔 아래, 붓이 살아 움직였다.

수장 도유사의 손가락 마디는 필혹이 돋아 있었다.

새하얀 문사복에 유건을 쓴 그의 앞에,

학처럼 맑은 눈을 지닌 소녀 하나가 꿇어앉아 있었다.

공간엔 숨소리 하나만 살아 있었다.


"현옥아..."


그의 목소리는 실보다 얇고, 수면처럼 깊었다.


"마음의 붓으로 세상을 가르거라.

마음의 미혹이 사라질 때,

검결만으로도 세상을 가를 수 있다."


빛조차 들지 않던 방 안, 현옥의 눈동자엔 고요한 물결이 일렁였다.

오래된 글귀 하나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유사는 조용히 일어섰다.

전하고픈 것이 많았으나, 침묵이 가장 완전한 언어였다.


그는 검은색 영패를 꺼내어 내밀었다.


"향찰령이다. 선황의 어지다."


현옥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손끝은 작고, 떨리고 있었다.


"선황께서 승하하신 지금, 관청까지 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흑단목은 가볍고, 차가웠다. 가벼워진 제국의 명처럼.


"정명사, 현옥. 어지를 받듭니다."


소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 제례는, 천지자연을 가른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명이란, 바른 이름을 부여하는 것.

이름은 곧 경계이며, 주술이다.

존재하지 않던 것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


괴력난신을 예악으로 되돌리는 이름의 제례— 그것이 정명.

현옥은 말없이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정이 도유사 인장을 내어주며 말했다.

"경성 관보과에 가서 유달산의 새 이름을 관보에 실어라."


바람은 없었지만, 등나무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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