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조 향교 탄압 작품소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향교 제도 탄압과 변화
1. 정책적 배경 및 탄압 방식
일제는 황민화(皇民化) 정책 아래 전통 유교 제도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총독부는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 세력이 3·1운동 등 민족운동의 근거지라고 판단했으며, 유학·향교를 구시대적이고 위험한 기반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곧바로 향교재산 관리권을 지방 관청(부윤·군수)으로 이전시켜 향교 재산을 관유화하고, 향교 운영과 재산 처분을 모두 총독부의 허가 사항으로 규정했다. 특히 〈향교재산관리규정〉(1910년)과 〈향교재산관리규칙〉(1920년) 제정을 통해 향교 수입을 향사비나 지방 공립학교 비용으로 강제 전용하고, 새 교육비용은 향교 재산으로 충당케 함으로써 조선인 교육 지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총독부는 법령과 규칙을 동원해 향교를 국가 재정권 아래 두고 친일 교화에 이용함으로써 유교 전통을 제도적으로 억압했다.
2. 향교 폐쇄·통폐합 사례
조선총독부는 전국 향교의 수를 대폭 줄이고 통폐합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부·군 통폐합) 때에는 폐지된 부군의 향교를 인근 부군의 향교와 통폐합하여 지방행정단위에 편입시켰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부군 합병에 따라 각 부군 소재 향교들이 통합되었고, 향교 제례도 종래 양력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에 따라 전국 곳곳의 향교가 수축되거나 폐쇄되었다. 제주도의 경우 일제는 향교 두 곳(대정향교·정의향교)을 폐교하였고, 제주향교마저 철폐하려 했으나 제주지역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유지되었다. 이 밖에도 신사참배 강제나 사직단 폐지(1911년) 등 유교 의례의 말살 조치와 연계되어 향교는 사실상 지방단위 행정기관으로 전락했다.
3. 향교 재산 몰수 및 교육기능 축소
향교의 재산과 교육 기능은 철저히 축소되었다. 앞서 1910년 4월 공포된 〈향교재산관리규정〉에 따라 향교 토지·건물 등의 소유권은 부윤·군수에게 넘어갔고, 향교재산 처분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예외적으로 총독부의 승인하에 가능토록 했다. 총독부는 이후에도 향교 수입을 지방 공립학교 운영비·사찰 및 문묘 수리비로 회수하도록 강제하여 유교 교육 기능은 유무형으로 상실시켰다. 예컨대 일제는 1920년대까지도 공립보통학교 경비를 향교 재산으로 부담하게 했는데, 이는 일제 정책이 조선인 교육에는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총독부는 향교 관리를 위해 향교장(掌議)을 선임하되 이들에게 관헌인 보수와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향교를 친일 관제 단체로 탈바꿈시켰다. 이처럼 향교 재산은 총독부 및 지방관청 관리 아래 놓였고, 교육·교화 기능은 사실상 일본 식민행정의 필요에 따라 전환·축소되었다.
4. 유림 및 향교 운영자의 대응과 저항
전통 유림과 향교 운영자들은 일제 조치에 저항하고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예를 들어 1922년 경상북도 달성군 유림 454명은 대구부 향교의 관할 구역 변경을 청원했으나, 총독부는 1923년 “달성군 청원은 일리 있으나 종래대로 대구부에서 관리하며 달성군 이익을 고려하라”는 절충안으로 답해 기각했다. 황해도 백천군의 유생 12명도 총독부가 향교·문묘 제례를 양력으로 시행한 데 반발해 “음력으로 시행해달라”고 청원하였고, 교육당국은 “전례대로 음력 시행”을 지시함으로써 일부 요청을 수용했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모든 탄원에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군 태극교 지부가 향교재산 반환을 요구했으나 “향교재산은 지방관 관할”이라는 이유로 총독부가 기각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유림들은 청원·탄원 활동과 지방 향교 운영참여(향약, 유림단체 조직 등)로 저항했으나, 대부분 일제의 ‘회유와 응용’ 전략에 제약을 받았다.
5. 관련 법령·훈령과 시기별 흐름
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향교 관련 법령을 수차례 개정·발포했다. 주요 문서를 연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0년 4월 23일, 학부령 제2호〈향교재산관리규정〉 공포: 향교 소유 재산을 지방관이 관리하며 처분을 원칙금지로 규정. 향교 수입은 관내 공립학교·사찰 등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1911년 2월 8일, 사직단폐지훈령(학발 제154호): 왕실 및 국가 제사의 일부 폐지. 향교·문묘 의례에도 파장이 있었다.
1920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령 제91호〈향교재산관리규칙〉 제정: 1910년 규정을 개편하여 총독의 인가 아래 향교재산 처분을 허용하고, 수입 사용범위를 문묘·교화비로 확대했다.
1920년대, 「학교비령」 제정: 공립학교 운영비를 호별로 부과하도록 하여, 향교재산으로 강제 부담케 했다.
기타 행정조치: 부·군 통폐합(1914년) 후 향교 통합, 제례의 양력 전환(1910년대~) 등 제도변화, 각종 훈령 및 지방공고를 통한 조직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법령과 고시들을 통해 총독부는 향교 제도 전반을 일본식 교육·사상 교화에 맞추어 개편했으며, 그 결과 향교는 일제 말기까지 본래의 교육 기능과 자율적 운영 기반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
출처: 위 내용은 조선총독부 기록 해제 및 연구 자료를 종합한 것으로, 해당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는 1911년 종교·사찰령을 공포해 사찰을 통제한 데 이어 향교재산을 지방관청 소유로 귀속시키고 변동 시 총독부 인가를 받도록 했다. 1920년에는 향교재산관리규칙을 제정해 향교재산을 국가 교화 사업에 동원했으며, 이를 통해 유림을 회유·통제하려 했다. 각 사건의 연도와 사례, 조문 내용 등은 인용한 문헌과 기록원 문서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