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 # 5차 자료조사

by 회안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유림 탄압 정책과 사례

1910년대 초반: 전통 교육기관 해체와 재산 통제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의 국가이념인 유교를 말살하기 위해 성균관 폐지와 함께 전국 향교의 교육 기능을 박탈했다. 합병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지방 향교를 교육기관 자격에서 배제하여 향교는 사우(문묘) 제례만 거행하는 기관으로 축소되었다. 같은 해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제정해 향교 재산을 도·부윤과 군수가 관리하도록 관유화했으며, 1911년에는 사찰령을 공포하여 1천여 개 향교·사찰 재산을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이로써 모든 향교 재산은 총독부 인가 없이 처분할 수 없게 되었고, 수익은 공립보통학교 건립 등 식민교육 자금으로 흡수되었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지례향교는 일제 말기에 금산향교로 통합되었다가 해방 후 복원되었다. 이 시기 많은 유교 지식인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순절(殉節)하거나 은둔으로 저항했다. 실제로 을미ㆍ경술 합병 직후 황현(호 매천) 같은 유생이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아편 자결했으며, 많은 유림이 자결ㆍ망명을 선택했다.

소설적 활용: 배경 서사에서 합병 직후의 비통함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주인공 유림이 일제 관료에게 신축 교실로 헌납될 향교를 지키려 몸부림치거나, 의식으로 자결을 결심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양반 자제의 자결 결의문(절명시) 낭독 장면이나, 향교 교실이 공립학교 교사로 강제 전환되는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1920년대: 분열·통제 정책과 유림의 독립운동

3·1운동(1919) 이후 일제는 유림을 회유·분열하며 민족운동을 차단했다. 총독부는 경학원·향교를 장악하고 친일 유림단체(대동학회, 대동사문회, 유도진흥회 등)를 결성·지원하여 순수 유림의 제향과 교육 활동을 방해했다. 1920년 6월 「향교재산관리규칙」을 통해 기존 규정을 강화하였는데, 특히 향교 수입으로 공립보통학교 운영경비를 충당하도록 명시했다. 1920년대 향교 재산은 도지사·군수 주도의 관정사업 자금으로 전용되었고, 학교 운영이나 유림 인재 양성에는 사용된 사례가 없다. 일제는 향교마다 장의를 두어 운영하게 하고 지역 유지들을 포섭하여 친일파로 만들었다. 이처럼 관영 혹은 친일 인사 중심으로 향교를 통제하면서 순수 유림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대표적 사례 – 파리장서 운동: 경상도 유림을 중심으로 137명의 유생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다 발각된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은 유명한 예이다. 김창숙·곽종석 등 대표들은 청원서를 인쇄해 국내 각지 향교에 배포했으나 일제에 의해 현지 조사·감시되었고, 서명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북 성주·영주 지역에서도 김동진·김택진·정태진 등 유림 대표가 서명에 참여했고, 3·1운동 현장에서 이 사실이 발각되어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밖에도 유생들은 지속해서 항일 청원 서한을 작성했으나 일제의 추적과 검열에 시달렸다.

소설적 활용: 비밀 모임을 갖던 정안조(가공) 같은 유림 인물들이 경찰에 발각되어 향교가 폐쇄되거나 유림단이 체포되는 장면으로 긴장감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복군 자금을 모으려던 유림들이 향교에서 회합하다 창문 밖에 숨어 있던 헌병의 등장으로 흩어지거나, 3·1 독립선언 소식을 전해 들은 향교 교직자가 체포되는 플롯 등이 가능하다. 파리장서 사건을 바탕으로 김창숙 역할의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김창숙에게 서한을 전달하려다 색출되는 에피소드도 긴박감을 준다.


1930~40년대: 황국신민화와 제례 말살 정책

1930년대 일제는 황국신민 서사(誓詞)와 신사(神社)참배를 강제하며 유교 전통의 남은 제례마저 금지·왜곡했다. 향교와 사우는 공식적 종교로 인정받지 못해 일체의 모임이 잠정적 불법이 되었고, 공립학교가 확충되면서 많은 향교 건물은 일본학교 교사로 전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통 제례를 ‘불필요한 구습’으로 간주하고 향교 및 사당에서의 제향을 금지하거나 비밀리에 치르게 하였으며, 역서(歷史書)와 사서(史書)는 반일 선동문서로 분류되어 압수·소각했다. 예를 들어 일제가 특히 눈여겨본 사료(「단군고사」 등)와 대종교 경전들은 전국 각지 향교와 사당에서 빠짐없이 압수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청년·학생을 전장으로 동원하기 위해 일련의 ‘전시교육’ 제도를 실시하면서 향교의 흔적은 더욱 희미해졌다.

서사적 활용: 전통 제례가 금지된 상황을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주인공 현옥이 조상의 산소나 향교 대성전에서 몰래 제례를 지내려다 일본 순사에게 들키고, 이를 구실로 향교가 수난을 당하는 극적인 상황을 묘사할 수 있다. 향교의 마지막 수호자가 퇴직 또는 타지로 쫓겨가며 대성전의 등불이 꺼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일본 신도의 사당이 향교 자리에 들어서거나, 친일 유림이 향교 명륜당에서 천황제 재물을 준비하는 연출 등이 전통 대립의 상징적 갈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정책 유형과 지역별 사례 정리

향교 통폐합 및 시설 전용: 일제가 전국 향교를 직접 통제하면서 1910년대부터 소규모 향교를 인근 대향교로 통합했다. 예컨대 전라북도 지례향교는 충남 금산향교에 흡수되었다. 부산·경남 지역의 동래향교 등도 향교 건물이 일본식 학교 교실로 쓰이거나 공공기관 건물로 전환되었다. 해방 뒤 지방유림의 지속적 청원으로 일부 향교가 복원되었다.

재산 몰수 및 관리 규정: 1910년대부터 제정된 향교재산관리규정과 규칙은 향교 토지·목장의 매각·증여를 모두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실제로 도로 확장이나 농로 개척 등의 명분으로만 향교 재산 매각이 승인되었으며, 학문 교육용도로는 한 푼도 사용되지 않았다. 지방 관공서가 향교를 장악해 소작인으로 전환하거나 군내 청년훈련소 부지로 강제편입하기도 했다.

제례 금지와 의례 통제: 식민 통치기 예배와 제례는 일본 신도식으로 대체되었고, 문묘·종묘 제향도 왜곡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친일 유림만이 명목상의 제향을 실시했으며, 전통 서원이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유림 자체 모임마저 불법화되어, 유생들은 가정 사당이나 소학교 운동장에서 몰래 향사를 지내야 했다.

유생 저항과 청원: 유림은 합방 청원서 거부, 해외 독립운동 참여, 문집 출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1919~20년대 대표적 예로 파리장서(제1차 유림단사건) 외에도, 청도·성주·영주 등의 지역 유생들이 독립청원서 모집에 가담했다. 일제 말기까지 순국·옥사한 유림 인사, 만주·연해주 망명자(유인석, 유린석 등)도 많았다.


각 사례는 소설적 갈등과 인물 설정에 풍부한 소재가 된다. 예를 들어 전남 목포 유달산 향교를 배경으로 조선과 일본 양측 갈등을 그리거나, 가상의 유림 조직인 정안조의 회합이 경찰에 발각되어 향교가 강제 폐쇄되는 전개를 구상할 수 있다. 또한 열혈 여학생 현옥이 무덤에서 조상 제례를 지내려다 당국에 체포되거나, 고문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통해 일제의 잔혹함을 부각할 수 있다. 이처럼 일제의 유림 탄압 사례는 소설 속 긴장·갈등 요소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동아일보 등. (위 사례와 자료는 본 소설 배경 설정을 위해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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