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鍮達 傳奇) #4 운명의 서곡

정안조

by 회안림


유달산 위, 달빛은 서늘하게 쏟아졌다

그날 시회의 이면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파한 시회 뒤, 바위에 앉은 정안조는 술상을 붓으로 장단 삼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 앉은 자들은 시인묵객이 아니었다.
밤의 얼굴을 쓴 이들, 수상한 복색의 인물들만이 그의 붓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안조가 붓놀림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붓으로 내는 장단이 어떠하냐?”


술객 하나가 즉시 받았다.

"조선 팔도가 그 장단에 춤출 것입니다."


또 다른 술객도 바짝 다가들며 아첨을 더했다.

“저희는 대감님의 친필이 되겠습니다.”


정안조는 비릿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래, 허투루 쓰지 않으마.”


그러자 한 인물이 신중히 덧붙였다.
“하지만 선비들의 붓은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정안조는 칼칼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붓을 꺾지 못하면 벼루를 깨고,

그것도 안 되면 연적을 깨고,

끝내 종이까지 찢어버릴 것이다.”


술객 하나가 물었다.

“성균관이며 향교는, 어찌하시렵니까?”


정안조는 듬뿍 먹을 찍어 종이에 휘갈겼다.
그의 글씨는 패도적이었다.

없을 무(無), 쓸 용(用)

“있되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그의 말에 공간이 무거워졌다.
“향교의 심종사들은 저희가 쓸어버리겠습니다.”


정안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지한 놈… 심종의 힘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자가.”


술객이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정안조는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너희는 나라의 이름을 바꿀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있다.”


“천지자연을 가를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있다.”


정안조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조선이 제사만으로 500년을 버텼을 것 같으냐?”


1897년,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 향교에 향찰령을 내렸다.
향찰령 — 유교 심종사들에게 내린 어명이자 국가 총동원령이었다.


심종사.
그들은 경전의 껍데기 속에 갇힌 교종과 달랐다.
괴력난신을 예악으로 돌리는 견귀염핵의 안력을 지녔으며,
심(心)의 글자 하나로 자연의 결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정안조는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도를 담지 못하고 입신양명을 택했다.
심종의 능력 일부만으로 출세했고, 유배전에는 의금부도사에 까지 올랐다.


고종의 환구단 제례는 보이지 않는 신과 신의 대격전이었다.
그 격전으로 심종사들은 대부분 소진되었고,

이제 대한제국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정안조는 말없이 혀를 찼다.
“어리석은 자들…”


그는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그들과 맞붙으라는 게 아니다.”


술객들이 당황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저희는 무슨 쓸모가…”


정안조는 유달산의 석벽을 가리켰다.
“너희가 할 일은, 저 봉인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 석벽 아래, 고대의 결이 봉인되어 있었다.
유달산. 본디 이름은 유타라산.
신들의 통로이자, 영혼의 샘이었다.


“심종사들이 대적해야 할 진짜 상대는 바로 저기야.”


정안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괴력난신이 풀려나면 심종의 남은 힘도 소진되겠지.
그럼 붓도, 이름도, 모두 끝나리라.”


술객들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들은 심종사처럼 빛나는 별이 아니라, 한낱 반딧불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안조의 욕망과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를…

그들은 유달산 아래, 고요히 잠든 공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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