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의 밤은 태초부터 고요하지 않았다.
돌을 긁는 칼날 같은 바람,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식은 기운의 수증기,
그리고 그 사이를 누비는 붓의 결—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
오래전 잊힌 존재가 남긴 지문이었다.
정안조는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지 십여 년, 그 눈은 더는 선비의 맑음을 닮지 않았다.
동정도 후회도 없이, 오직 세계를 찢을 결심만이 담긴 눈이었다.
“심종만 부수면 유림은 빈껍데기다.”
그는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바위 아래, 백발의 술사가 문양을 따라 주술을 읊고 있었다.
“이 땅에 묻힌 이름이여, 못 이룬 원념이여,
봉인을 부수고 나오시어
저희와 함께 하소서.”
정안조는 이 순간을 위해 버텨왔다.
‘새로운 힘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술사의 의식이 진행될수록 그의 입술은 미세하게 올라갔고
눈동자 속에는 서늘한 광기가 번졌다.
이마엔 땀방울 하나 없었다.
차디찬 열망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붓을 쥔 자만이 세상에 군림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따를 도(道)다.’
주술의 붓이 지나가며 그려낸 한 획, 또 한 획—
살아있는 살처럼 떨린 바위가 울컥거리더니
공기가 찢어졌고, 산등성이가 갈라졌다.
백발의 술사는 그 환영 속에서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머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바닥을 적셨고,
그의 숨은 거기서 끊겼다.
술사들이 동요했다.
뒤쪽에서 그동안 아무 말이 없던 검은 장포의 술사가 일어섰다.
짙은 기운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검은 장포에 감춰진 몸, 뒤틀린 관절, 찢어진 입꼬리—
그의 발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디딘 자리마다 땅마저 음울해지는 느낌이었다.
“피의 기운이 부족했나 보군요.”
술사는 냉혹한 웃음을 흘리며 시신 위에서 붓을 들었다.
그 손등은 마치 관절이 반대로 접힌 것처럼 비틀려 있었다.
그는 죽은 술사의 피를 붓에 듬뿍 적셨다.
붓끝이 피를 머금자, 그의 눈동자가 일순 늘어졌다가 번쩍이며 웃었다.
“덕분에 제대로 준비가 되었군요.”
그는 부적의 마지막 결을 그었다.
그 순간—
“누구인가…”
바위 중심에서 음성이 터졌다.
부적이 찢어지듯 터졌다.
바위 산 전체가 진동하는 듯했다.
술사들이 일제히 부복하였다.
봉인의 중심에서 솟아오른 ‘존재’는 아직 형체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감각을 동시에 짓눌렀다.
눈은 멀고, 귀는 막혔으며,
오직 하나—존재한다는 실감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술사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이 땅의 봉인을 풀러 온 술사, 오모가 신을 알현합니다.”
그는 정안조가 준 유교 심종의 붓을 제례의 불 속에 던졌다.
“이 땅의 존재시여, 이 제물을 바치오니 마지막 하나까지 흠향하소서.”
그러자 어둠 속에서 중첩된 음성이 울렸다.
“참으로 좋구나. 앞으로 이 제물을 더 많이 다오.”
술사는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곧 당도할 것입니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흠향하소서."
"너희의 제물을 받겠노라."
그 순간, 바위 뒤에서 눈동자 하나가 열렸다.
그것은 수백 년 전, 사라연이 죽음으로 봉인한 존재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은 술사를 보지 않았다.
그 시선은—천계의 무사, 보현자를 향하고 있었다.
“크하하… 아직도 있었느냐.”
불길한 존재의 울림이 유타라산을 흔들었다.
한편, 향교의 밀실.
도유사가 창문도 닫힌 방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기어이 열렸구나...”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벽장을 열고 목함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엔, 열지 못한 심종 비기의 붓이 있었다.
십여 년 전, 병환으로 고종의 환구단 제례에 참여하지 못했던 그날 이후
그는 매일 이 붓을 외면했다.
그 봉선 제례는 심종사들의 생명을 삼킨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는 붓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심종이여, 저를 도우소서.”
늙은 손이 붓을 들었다.
그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단했다.
그 붓은 이제 예악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칼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정안조가 예악의 이름을,
이미 불길한 존재에게 바쳤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