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 # 7차 자료조사 대한제국기 관원 복식

1907년 대한제국 관원 복식 제도 조사

by 회안림


1907년 대한제국 관원 복식 제도 조사

관원의 품계별 복식 체계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등)

대한제국 시기 관료들은 직급(품계)에 따라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던 1품~9품의 관등을 1895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거치며 이 세 등급 체계로 재편한 것입니다. 칙임관은 정1품에서 종2품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리들이며, 황제가 직접 임명장을 수여하는 **친임관(親任官)**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주임관은 그 아래급으로 대략 종3품에서 종5품(또는 종6품) 사이의 중견 관료들이고, 판임관은 종6품 이하 종9품까지의 하급 관료층을 가리켰습니다. 이러한 등급에 따라 관원의 **예복(禮服)**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 문관대례복(文官大禮服, 문관 최고 예복)의 장식과 무늬에 등급별 차등이 두어졌습니다. 예컨대 1등 칙임관의 대례복에는 활짝 핀 무궁화 문양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4등 칙임관의 경우 반쯤 핀 무궁화 6송이만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식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이처럼 대한제국은 관원의 신분과 품계에 따라 복식의 형태와 장식을 차등화하여 위계를 드러냈습니다.

관복(官服)과 제복(制服)의 구분 및 복장 규정

관복은 관원이 공식 석상에서 입는 복식을 통칭하며, 제복은 군인이나 경찰 등 무관(武官) 분야에서 정해진 양식의 유니폼을 가리킵니다. 대한제국기에는 전통 한복 양식의 관복 대신 서양식 복장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는데, 이는 1895년(고종 32년) 군인과 경찰에게 서양식 **군복(제복)**을 채택한 데 이어 문관의 관복까지 서구식으로 통일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1900년 4월 17일 공포된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은 문관 관원의 복식을 서양식으로 규정한 최초의 법령으로서, 문관 관복의 종류, 착용 대상, 착용 상황, 구성 요소 등을 상세히 정했습니다. 이 규칙과 같은 날 공포된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 제식」**에서는 그중에서도 대례복의 디자인과 세부 사항을 정하고, 이후 도해(圖解)를 관보를 통해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관복과 제복의 차이는 주로 용도와 디자인에서 드러났습니다. 문관의 관복은 황제가 주재하는 조정 의식이나 공식 행사에 입는 예복과 평시 업무 때 입는 상복으로 구성되었는데, 1900년 이후 이들은 모두 양복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제복은 군인·헌병·경찰 등의 직책별로 정해진 유니폼으로, 대한제국 육군의 경우 이미 1895년 서구식 군복을 도입하였고 1897년 이후 프랑스식 군복과 케피모 등을 받아들여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고종 황제 자신도 1899년 조칙을 통해 검은색 서양식 군복에 오얏꽃 문양 단추와 어깨의 별 5개 계급장(대원수 계급 표시)을 부착한 대원수 군복을 자신의 평상 복장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는 대한제국 군주의 군권 장악과 함께 제복을 통해 황제의 위엄을 과시한 사례입니다.

관복의 색상·소재·문양·모자 규정도 서구식을 따랐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 관복은 품계에 따라 여러 색상과 소재(예: 단령, 조복 등)로 구분되었지만, 대한제국기 서구식 관복은 주로 **검정 또는 감색 모직(wool)**으로 만든 양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여기에 품계나 소속에 따라 금색 자수 문양을 추가했는데, 문관 관복에는 대한제국의 국화인 무궁화 문양을, 궁내부 등 황실 관원 관복에는 오얏꽃(자두나무 꽃) 문양을 장식하여 구별했습니다. 모자는 종전의 복두나 사모 대신 서양식 모자를 사용하였는데, 실크로 만든 **실크해트(silk hat)**가 주로 예복용 모자로 지정되었고 평상시에는 양모로 된 중절모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단추 역시 황실 상징이 새겨진 금속단추를 썼고, 신발은 가죽 구두를 착용하여 전통 흑화(革靴)를 대체하였습니다. 요컨대 대한제국 관복은 전통 요소를 거의 모두 서양식으로 교체하면서도 태극기, 무궁화, 오얏꽃 등 자국의 상징 문양을 가미하여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복(大禮服·小禮服)과 평상복(常服)의 구분

대한제국 시기 관원의 복장은 격식의 정도에 따라 대례복, 소례복, **상복(常服)**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대례복(大禮服)**은 말 그대로 국가의 대례(중요 의식) 때 착용하는 최고 등급의 예복으로, 황제 참석 행사나 외교 사절 알현 등 가장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입었습니다. 서양식으로 개정된 대한제국 문관대례복은 영국 궁정의 예복을 본떠 디자인되었으며, 검정 모직으로 된 긴 상의(연미복 형태의 상의)에 금색 휘장과 자수를 곁들인 화려한 복장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자, 흰 장갑, 의장용 검까지 갖추어 입도록 규정되어 있어 황제를 배알할 때는 칼과 모자까지 완비한 차림을 요구했습니다. 대례복은 관리의 품계에 따라 자수 문양의 수와 형태가 달랐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무궁화 문양의 수량과 형태로 구분되었고, 1906년 개정 이후에는 깃(collar)을 높인 스탠딩칼라 형태에 목까지 단추를 채우는 디자인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소례복(小禮服)**은 대례복보다 한 단계 낮은 격식의 예복입니다. 개항기 초기에는 전통식 소례복(주의, 답호 차림)이 쓰였으나, 1900년 「문관복장규칙」 제정으로 서양식 **연미복(燕尾服, 테일코트)**이 공식 소례복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연미복은 상의 뒷자락이 제비 꼬리처럼 갈라진 예복용 상의로, 실크해트(모자), 연미복 상의, 조끼, 바지, 구두를 한 벌로 착용하였습니다. 소례복 차림은 궁중 연회에 참석하거나 황제를 알현할 때, 각 부서의 상관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할 때, 또는 사교적으로 축하·조문할 때 등 격식을 차리되 대례복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 입도록 정해졌습니다. 1905년 1월 16일자 관보에 실린 정오(正誤) 공고를 통해 소례복은 연미복과 프록코트(frock coat) 두 가지로 세분되었는데, 연미복은 주로 외국 사신 접견, 궁중 연회, 내·외국 고관들과의 만찬 시에 착용하도록 했고 프록코트는 낮 시간대 황제를 진현(進見)할 때나 국가 경축일 행사, 사적 예모(禮貌) 방문 때 착용하도록 구분하였습니다. 프록 코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상의로서 연미복보다 덜 화려한 예복인데, 실제 유물로는 당시 박기종(朴琪淙, 1839~1907)이 착용했던 프록코트 한 벌이 현존하여 그 형태를 전해줍니다. 한편 판임관과 같은 하급 관원이 예기치 않게 대례복 착용이 요구되는 의식에 참석해야 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대례복 대신 소례복 차림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상복(常服)**은 관원의 평상시 복장으로, 오늘날의 근무복이나 평상 업무복에 해당합니다. 1895년 을미개혁 당시 처음으로 “통상복”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고, 1900년 「문관복장규칙」에서 상복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상복은 전통적으로는 검은 단령(團領) 차림이었으나, 대한제국기에는 서양 남성복 정장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곧 **양복 상의(통상의)**와 조끼, 바지, 그리고 통상모로 이루어진 삼피스 정장 차림이 문관 상복의 기준이었습니다. 색상은 주로 검정이나 감색 계통의 어두운 색으로 정장을 맞추었고, 모자는 검은 펠트 해트(중절모 등)를 쓰거나 실내에서는 벗었습니다. 상복 차림은 관리들이 사진(仕進) 업무를 보거나, 일상적으로 집무를 볼 때, 그리고 비교적 격식을 차리지 않는 사무적 모임에 참석할 때 착용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관원이 평일에 관청에 출근하여 업무를 집행할 때는 상복 차림을 기본으로 했고, 연회나 접견과 같은 격상된 자리가 아니면 늘 상복으로 다녔습니다. 상복까지 서양 양복으로 통일한 것은 복식 간소화와 근대적 관료 이미지 연출을 위한 것으로, 대한제국은 이러한 상복 제도를 통해 서구 열강과 대등한 근대 국가 관료제의 면모를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문관대례복 유물 (1906년 개정 양식). 검정 모직으로 된 연미복형 상의와 바지에 금색 무궁화 당초 문양 자수가 놓여 있다. 문관대례복은 1900년 최초 규정 이후 1906년 고종 칙령 제75호로 디자인이 변경되었는데, 앞면의 금색 문양을 생략하는 대신 깃, 소매, 뒷자락 등에만 무궁화 등의 국화(國花) 문양을 배치한 보다 단정한 형태였다. 사진의 대례복 역시 앞가슴에는 문양이 없고, 대신 소매 끝동과 등 중앙에 무궁화 문양을 금박수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1900~1907년 복제(服制) 개정과 관련 칙령

대한제국 시기 관원 복식에 대한 법제는 1900년을 전후하여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의 예복 체계를 황제국에 걸맞게 격상시키는 한편(예: 황제가 입는 면복을 ‘십이장복’으로 개정), 관료들의 복장을 근대 국가에 맞게 정비하고자 하였습니다. 1899년 고종은 원수부를 설치하고 직접 대원수복(大元帥服)을 입는 등 군복을 서양식으로 교체하는 조치를 내렸으며, 이어 1900년 4월 17일에 이르러 문관의 복장에 관한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과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 제식」**을 공포하여 백관복의 서양식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두 칙령을 통해 문관 관복이 전통 한복에서 양복으로 공식 전환되었고, 같은 해 4월 19일 관보 호외에 게재되어 널리 공지되었습니다. 또한 1901년 9월 3일자 관보에는 「문관대례복 도식(圖式)」이 실려, 대례복의 그림 자료와 세부 규격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 정해진 복식 제도는 이후 1904~1905년에 한차례 수정되었습니다. 이는 정식 새로운 칙령은 아니고, 관보에 실린 정오(正誤) 형식의 수정 공고였습니다. 1905년 1월 관보 정오에서는 앞서 언급한 소례복을 연미복과 프록코트 2종으로 세분하고 각각 착용할 상황을 구체화하였으며, 몇 가지 조항의 순서와 내용을 조정하였습니다. 이어 1906년 12월 12일 고종은 칙령 제75호로 「문관대례복 제식」을 전면 개정하였습니다. 이 1906년 개정에서는 대례복 디자인을 다소 단순화하고, 칼라를 스탠딩형으로 변경하며, 조선 통감부를 통해 간섭을 시작한 일본 측 눈치를 보아 일본 문관 대례복보다 격을 낮추는 형태로 제정된 것이 특징입니다. 구체적으로 1900년형 대례복이 앞뒤에 모두 화려한 금수문을 놓았던 데 반해, 1906년형은 앞면 장식을 생략하고 대신 뒷면과 소매 등에만 국화 문양을 두도록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정으로 인해 대한제국 관복의 디자인은 간결해졌으나, 이는 국권이 점차 제약되는 상황에서 자주적 상징을 축소한 측면도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한편 1907년 고종의 양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급변한 정세로 인해 관복 제도의 추가 개정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06년형 문관대례복은 실제로 제작·착용된 기간이 짧았고,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관복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복식에 가미된 서양식 요소와 영향

대한제국 관원 복식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식 복식 요소의 적극적 수용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양장(洋裝)**에 대한 사회적 허용이 이루어지자 관가(官家)에서도 전통 복식을 과감히 버리고 양복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먼저 양복(洋服), 즉 서양식 정장이 관리들의 일상 복장으로 채택되었는데, 상의와 바지, 조끼로 이루어진 3피스 수트와 모자가 관복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서구 열강의 외교관·관리들이 입던 공식 복장과 유사한 형태로, 대한제국 관료들도 모자까지 갖춘 정장을 입음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문명국 관료로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복의 분야에서도 양복 요소를 도입하여, **테일코트(연미복)**와 프록코트 같은 서양 남성 예복이 공식 예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연미복의 꼬리부분이나 프록코트의 실루엣, 실크 모자와 흰 장갑 등은 모두 빅토리아 시대 유럽 신사의 복장에서 유래한 것들로서, 조선 전통 복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요소들이었습니다.

서양식 군복의 영향도 컸습니다. 대한제국은 군제 개혁과 함께 근대식 군복제를 도입하여, 구식 군복 대신 프로이센·프랑스식 장교 군복, 철모 대신 케피모(kepi)나 챙달린 군모 등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서양식 대원수 군복을 직접 착용하고 초상 사진을 남겼는데, 이 복장에는 어깨에 **에폴렛(epaulette)**과 금색 수술 장식, 목 깃에 다섯 개의 별(star) 계급장이 부착되어 완연한 유럽식 장군 제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군복의 단추에는 오얏꽃 문장(조선 왕실 문장)을 새겨 넣어 전통 상징을 결합하였고, 관복의 금색 자수 문양에는 무궁화와 태극 문양 등을 활용하여 서구식 재단 위에 한국적 상징을 덧입혔습니다. 이러한 서양식 요소의 가미는 대한제국 복식이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자주적 **변용(變容)**을 시도한 부분이라 평가됩니다. 실제 1900년 제정된 문관대례복의 경우 프랑스 파리의 양복점에서 제작되었지만, 도안은 조선 궁중 도화서 화원들이 그려 태극기와 무궁화로 장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의 관원 복식은 **양식(洋式)**과 전통 상징이 융합된 형태로, 국제적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나라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는 짧은 기간 시행되었지만 한국 근대 복식사에서 전환기적 의미를 갖는 제도였습니다.

대표적 복식 자료와 사례

당시의 관원 복식을 보여주는 사료로는 관보에 실린 법령 원문과 도해, 그리고 사진 자료와 현존 유물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관료 사진들을 보면, 종래 도포나 관복 차림 대신 모자까지 쓴 양복 정장 차림의 대한제국 관리들이 포착됩니다. 고종이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던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의 사진에서도 이들이 유럽식 모자와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위 관료였던 윤치호의 1905년경 사진, 민영환의 대례복 착용 사진 등은 대한제국 관복의 실물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유물로는 현재 한국자수박물관에 소장된 민철훈 정무공사 대례복 일습,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윤치호 대례복, 부산박물관의 박기종 프록코트 상복 일습 등이 남아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실물이 없던 1906년형 문관대례복 한 벌이 한국맞춤양복협회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앞서 설명한 대로 앞가슴 장식이 생략되고 무궁화 문양이 뒷면에만 남은 디자인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진과 실물 자료를 통해 본 대한제국 관원 복식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절충된 독특한 형태로, 1907년 대한제국 말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대한제국 칙령 (관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역사문화자료, 연합뉴스 보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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