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매거진>은 골치 아픈 일 말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야. 한 번 들어볼래?
오늘은 멋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게.
나는 학창 시절에 소위 말하는 모범생이었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샌님 있잖아. 머리를 단발로 자르라고 하면 똑단발로 자르고, 치마를 짧게 입지 말라고 하면 꼭 무릎라인에 맞춰 입고, 넥타이를 하라고 하면 꼭 하는 그런 학생. 너희 학교에도 몇 명씩 있지 않았니? 난 내가 그랬어. 학생 땐 반항적인 기운 같은 게 있어서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반대로 하는 애들도 많잖아. 그런데 나는 쓸데없이 선생님들한테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별로였어. 머리를 기르나, 치마를 짧게 입으나, 넥타이를 푸나, 나한테 별 이득(?)이 없는 것 같은데 선생님들한테는 주구장창 싫은 소리를 들어야 되니, 왜 그런 시덥잖은 일로 힘을 빼고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 그래서 그냥 나한테 별 손해 나는 것 없으면 하란대로 하는 편이었어.
처음엔 그런 마인드였는데 말이야. 그게 여러 날 되다 보니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 자체가 모범생으로 굳어버린 느낌인 거야. 물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머리도 환타색으로 염색하고, 귀도 두 개나 뚫고, 친구들과 공들여 쇼핑도 했지만 아무리 해도 몸에 베여버린 모범생 같은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머리가 형광색인 모범생이라니. 뭔가 반듯한 이미지는 그런 잔재주로는 덮을 수가 없더라고.
또 내가 안경을 끼는데 눈알이 좀 예민한 편이라 멋쟁이의 상징인 렌즈, 마스카라, 아이라인, 이런 걸 전혀 못했어. 눈이 가려워서 살 수가 없었거든. 결국 벗지 못한 안경은 모범생의 이미지를 더 강화시킬 뿐이었어. 요즘에야 안경도 패션 아이템으로 쳐 주지만, 그때만 해도 순정만화 주인공은 비로소 안경을 벗을 때만 메인으로 나설 수 있었어. 난 여전히 멋으론 주인공감이 아니었어.
그렇게 모범생 이미지를 개선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채 살다가, 몇 년간 짱 박혀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시절이 다가왔어. 꽃 같은 20대에 말이야. 이 기간을 짧게 끝내려면 외모를 꾸미는 건 사치이고, 오직 공부! 이런 마음이 있었어. 머리를 기른다면, 공부에 방해된다. 화장을 한다면, 공부에 방해된다. 구두를 신는다면, 공부에 방해된다. 치마를 입는다면, 공부에 방해된다. 공부가 아닌 외모에 시간을 1분이라도 쏟으면 난 망할 것이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건데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지금 생각하면 종종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공부를 하는 날도 있었으면 기분도 환기되고 좋았을 텐데.. 싶지만 말야.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던 불안한 그 시절엔 그런 행동이 성공의 확률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고 믿는 징크스 같은 행위가 아니었나 싶어. 인과관계가 약하더라도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그런 동아줄 같은 것이었던 거지.
그 시절을 보내자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뭘 하던지 내가 무슨 긴 머리야, 안 어울리게. 내가 무슨 화장이야, 안 어울리게. 내가 무슨 구두야, 안 어울리게, 내가 무슨 치마야, 안 어울리게.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어. 아, 슬프다. 회사 들어가고 얼마가 지나자 완전 티셔츠에 운동화 차림이 기본값이 되어버렸지 뭐야. 난 원래 멋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세뇌가 되어가지고. 회사에선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되지 뭐, 꾸민다고 일 잘하나?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어. 쇼핑은 필요할 때만 하는 귀찮은 행위로 느껴지고, 그냥 비슷한 용도면 제일 싼 거! 이런 마인드였어. 난 책도 많이 읽고 남도 잘 이해하고, 마음이 멋있는 사람이니까 외모를 꾸밀 필요 없어,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했던 것 같애.
남자친구랑 데이트할 땐 기분도 좀 냈던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서는 다시 그 병이 도진 거야. 애도 안아야 하는데 어떻게 머리를 길러, 어떻게 화장을 해, 어떻게 구두를 신어, 어떻게 치마를 입어. 아니 애랑 뭔 상관이냐고. 근데 그때의 나는 꽤나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니까.
얼마나 보기 험했으면,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꾸미고 다녀라, 예쁜 옷 좀 입어라, 하시면서 용돈을 주셨다니까.(우리 어머님 최고)
사실 그때만 해도 내가 뭐 어때서? 나 인간적으로 너무 괜찮은 사람인데? 하고 생각했거든? 헤헤. 그런데 나이를 한 살 두 살 적립하고 보니 내가 참 멋없더라고. 멋도 멋인데, 스타일이라는 게 전혀 없으니까. 무색무취, 최저가 스타일. 그래놓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 자기를 멋있게 꾸미고 사는 사람을 마음속으로 시기 질투하고 있었어. 쟤는 속은 별로일 거야, 이러면서. 갑자기 현타가 오면서 이렇게 혼자 그들을 욕하고 있는 나야말로 겉도 멋이 없지만 속도 멋이 없는, 안팎으로 참 멋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더라고. 참말로.
그러다 내가 무슨 ~~ 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라는 걸 깨달았어. 내가 무슨 긴 머리야 》 머리숱이 많은 핑계로 십여 년간 단발이었던 내가 머리를 길렀어. 내가 무슨 화장이야 》 여전히 눈화장은 못하지만 기본 베이스를 안 하면 밖에 나가기 민망해졌어. 내가 무슨 구두야 》 구두를 운동화처럼 편하게 신기로 했어. 내가 무슨 치마야 》 하체비만인지라 의외로 치마가 잘 어울렸어.
그 외에도 심플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화려한 액세서리를 좋아했고, 깔끔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귀여운 가방을 좋아했고, 무채색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밝은 옷을 좋아했더라고, 나란 사람은.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고 산 거야.
내가 무슨, 공부하는 내가 무슨, 애 엄마인 내가 무슨, 회사원인 내가 무슨, 을 지우고 그냥 내가 원하는 걸 다 해보자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조금씩 알겠더라고. 좀 늦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알 수가 있더라고, 내 진짜 마음에 관심을 가지니까.
물론 꾸미는 게 최우선은 아니라서 꾸미는데 많은 예산을 배정하지는 않아. 그래서 명품백도 하나 없고, 쇼핑도 여전히 할인가가 아니면 망설여. 하지만 그런 제한 안에서도 충분히 내가 원하는 멋을 추구할 수 있었어. 엊그제도 하얀 물만두 같은 가방을 샀는데, 예전 같으면 절대 안 샀을 것 같은 디자인이거든. 지금의 나는 저렴한 가격으로도 원하는 아이템을 찾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애.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 멋 부리는 생활을 하다 보니 머리가 길어도, 화장을 해도, 구두를 신어도, 치마를 입어도 일하는데 하등 영향을 안 주고, 오히려 멋 부리는 게 별 것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 큰 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간 마음의 허들이 높아서 못했을 뿐, 하고 싶은데 스스로 못하게 하니 괜히 멋 부리는 사람들을 질투했을 뿐, 사실은 별 것도 아니었구나, 싶어. 멋이란 건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말리지 않는 것, 그 자체인 것 같아. 그 결과물이 다른 사람 눈에 멋없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면 최고의 멋이지. 내가 '내'가 되는 게 멋이었던 거야.
그동안은 나로 살지 못했던 적도 있지만 앞으로는 나답게,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
넌 너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편이니?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에 발 빠르게 맞추는 편이야?
오늘 하루는 평소에 손이 잘 안 가는 옷을 찾아 입으면서 한껏 말랑해져 보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