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x 커피

by 시옷

<말랑말랑 매거진>은 골치 아픈 일 말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야. 한 번 들어볼래?



오늘은 커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커피를 주제로 골랐어.


난 고등학생 때까지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카페라는 곳에 가서

'비엔나 커피'라는 걸 시킨 게 기억이 나.

요즘엔 잘 들을 수 없는 이름인데,

그때로부터 한참 후에 허영만의 '커피 한 잔 할까요'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그때 내가 마셨던 커피가 '아인슈페너'라는 걸 알게 되었지.

대학교 새내기였던 나는 뭔 맛인지도 모르지만 이름이 예쁜 커피를 마시고 친구들과 커다란 소파에서 수다를 떨면서 내가 멋진 도시 여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

실상은 갓 고등학생을 벗어난, 아기티가 줄줄 흐르는, 어른 놀이 중인 꼬꼬마였지만서도.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간고사 기간에는 파란 통의 '레츠비'가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려.

그때쯤부터 도서관 옆 자판기 종이컵 커피도 무지하게 마셨어. 머리가 아프도록 달달하지만 목구멍을 넘어갈 때는 눈이 감기도록 쓴, 작은 종이컵에 반도 담기지 않은 갈색의 커피.

안에 내용물을 리필하러 오시는 아주머니가 화장실 물을 틀어 자판기 물을 채우신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며칠간은 레츠비만 마셨지만.

결국은 그 물도 물이다, 라며 달달씁쓸한 종이컵을 다시 찾게 되었지.


단맛이라고는 없는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신 건 언제였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엔제리너스며, 파스쿠찌며, 카페베네가 마구 생겨나던 시절

'점심값 보다 비싼 커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새로 생긴 브랜드의 카페를 찾아다니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한 것 같아.

달달한 커피를 마시려면 '시럽 넣어드릴까요?'라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해야만 했는데, 이게 큰 시험이었어. 왠지 시럽을 넣어 먹는 게 멋이 없다는 느낌이니까. 멋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시크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했어.

반은 강제로 먹기 시작한 쓴 아메리카노가 추운 겨울엔 어묵국물보다 더 큰 보온효과가 있고, 더운 여름엔 보리차보다 더 시원하다는 걸 점점 알게 되면서

아메리카노의 참맛 눈을 뜨게 되었지.


물론 원두별로 맛을 구분해서, 역시 예가체프는 향긋해서 좋단 말이야, 라고 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그저 내 입에 맛있다, 오늘 너무 좋다, 으악 좀 탔나, 요정도의 품평을 하며 마시고는 있어.

달달한 쿠키류 디저트를 먹을 땐 저절로 아메리가노가 땡기고,

산미 없는 것, 구수한 것만 외치다가 산미의 매력을 알아버렸을 때,

나 이제 커피 좀 마시나? 싶었지만

여전히 에스프레소를 입에 대고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니 난 커피 맛보다는 물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니깐.


막 입이지만 커피를 좋아해도 될까? 커피 구분도 못하는데 난 자격이 없어, 어디 가서 커피 좋아한다고 하지마, 넌 그냥 카페인이 필요할 뿐인 거잖아,라고 스스로를 커.알.못 취급하던 샤이 커피러버 시절에

갑자기 한 일 년 간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일이 있었거든.

억지로 커피를 참는 건 술을 참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더라.

커피 향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니.

일 년을 참고 아메리카노를 딱 마시던 그날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커피의 향이 10배는 진하게 훅-하고 들어오는데 저절로 눈이 감어.

그 후론 나 커피 좋아하는 애였네,라고 인정하고 비록 막 입이라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여하튼 난 커피를 좋아한다, 고 당당히 말하고 다고 있어.


넌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니?

아침마다 캡슐 커피를 내려 마시진 않고?

아님 커피는 맥심이니?


오늘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숍에 가서 위에서 다섯 번째 메뉴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며 한껏 말랑해져 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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