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동생에겐 안락한 아지트가 있었다.
숙제를 미루거나 심부름을 하지 않아서 야단을 맞았을 때 동생은 어김없이 그 아지트로 사라져 버렸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은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그곳으로 달아났고 일요일엔 아침밥을 먹고는 또 몸을 숨겼다. 그곳은 동생에게 있어 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안락하고 평안한 쉼터였다. 그가 안락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는 동네 야트막한 구릉이나 산자락에 드문드문 파놓은 참호였다.
반공정신이 투철한 시대였다.
반공, 방첩이란 글자가 학교 건물 상단에 높이 걸리고 교문에 들어서면 지각을 해도 반드시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야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군인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위무적으로 써야 했고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웅변대회는 반공을 주제로 할 때가 많았다. 흙장난에 빠져 있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그 자리에 서서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자글자글 끓어 올리던 시절이었다.
냉전시대의 분단된 국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국민이 멸공에 힘쓰도록 외치던 사회였다.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은 교련시간에 총검술과 제식훈련을 받았고 아저씨들은 민방위 훈련 때 참호에서 훈련을 받았다.
우리 동네 낮은 산에도 사격형의 참호가 여러 개 있었는데 몸을 웅크리고 앉으면 어른들도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곳이 동생의 비밀 본부였다.
동생은 가족들에게 본부의 위치를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그의 쫄병 중-(동네의 짓궂은 남자 애들을 우리 식구들은 동생의 쫄병이라고 불렀다)- 누구도 그곳의 위치에 대해 발설하는 자가 없었다. 동생은 과자봉지를 숨겨 본부 쫄병들에게 배식을 하며 나눠먹었고 새총과 장난감 총을 허리춤에 꽂고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할 것인가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장난감이 흔치 않던 그 시절에 동생은 그의 부대원들과 도원결의를 맹세한 의형제처럼 그곳에서 날마다, 때마다 뒹굴었다.
동생은 그곳에서 어떤 안락함을 느꼈던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구석진 곳을 찾아 숨어들었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본부는 동생에게 새 둥지처럼 편안한 곳이었다.
참호가 1단 본부라면 가을걷이 후 논 가운데 쌓아둔 볏단은 동생의 2단 본부였다. 어른들이 차곡차곡 쌓아둔 볏단을 이리저리 흩어서 펼쳐놓고 동생과 대원들은 제2의 본부로 사용했다. 그러니 그곳은 1단 본부처럼 비밀의 장소가 될 순 없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본부 2채에 대해 어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혹시나 불장난을 해서 일을 낼까 봐 늘 셩냥을 높은 곳에 치워두곤 하셨다.
어느 날, 동생과 할아버지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무엇 때문인지 기억은 없지만 서운한 마음에 동생과 대문 밖 골목길을 서성이며 한참을 담벼락에 기대서 툴툴거렸다. 그때 여동생 때문인지 스무 살 무렵까지 나를 언니라고 불렀던 남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1단 본부로 가자' 그 얼굴에는 나를 향한 위로와 새로운 안식처에 대한 안도와 그곳으로 가족을 초대하는 설렘이 있었다. 본부로 안내하는 동생의 발걸음은 빨랐고 가끔 나를 뒤돌아보면서 확인했다. 오전부터 바람이 불더니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1단 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언니 일루 들어와" 동생의 본부는 몸을 웅크려 숨기엔 최적의 장소였으나 내리는 비를 막지는 못했다. 비가 쏟아지는 참호 속에 계속 쭈그려 앉아 있다가는 이곳에서 익사할 수도 있겠다. "에이씨! 무슨 본부가 지붕도 없구. 집에 가자!!" 그때 동생의 얼굴은 하필 자기의 은신처로 초대한 날 쏟아지는 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본부가 컴플레인을 받은 것에 대한 실망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언니 그럼 2단 본부에 가자"
"아, 몰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나는 집으로 뛰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는 오후에 내 뒤를 따라 뛰는 동생의 발소리를 확인하며 그래도 1단 본부에 지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자꾸 새겼다.
야단을 맞고 나가 비에 젖은 생쥐꼴로 돌아온 그날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의 노여운 꾸지람을 다시 들었고 할머니의 걸쭉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으며 엄마의 빗자루에 등짝을 얻어맞아야 했다. 그리고 잠이 들 때까지 가족들의 잔소리를 들었다.
동생의 본부를 가끔 생각한다.
누구도 나의 본부를 아는 이가 없고 사라지지 않는 곳.
괜히 마음이 신산하다고 느껴지거나 시끄러울 때 나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런 본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찾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진심을 숨기고 굳이 웃는 얼굴로 마주 봐야 할 스트레스가 없는 곳에 몸을 숨기고 싶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애써보는 , 그런 가당찮은 노력에 지칠 때 찾아갈 수 있는 곳. 그곳에 가만히 앉아 꽉 쪼여진 마음의 벨트를 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불안에 대해 잠시 마음을 놓아보며 평화를 얻는 곳, 계산해야 하는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고 돌아와 좋은 향이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레몬향이 나는 뜨거운 차를 한잔 마셔야지.
그리고 어쩌다 커튼이 바람에 날리는 볕 좋은 날에는 좋은 사람을 그곳에 초대해야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뒤돌아 나올 땐 혹시나 하는 실수에 다시 곱씹어 보는 피곤함이 없을것이다.
그런 꿈을 꾼다.
내게 그런 본부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