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섬진강 때문이었다.
봄볕에 익고 있는 벚꽃을 구경하러 쌍계사로 나섰던 날 도로는 주차장이 되어 꼼짝을 안 했다. 서둘러 출발했다고 여유를 부리며 휴게소에서 늑장을 부렸는데 나들이 나온 상춘객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휴게소는 북적였고 그때부터 도로도 거북이걸음을 했다. 아침에 들뜬 마음은 길어지는 정체로 점점 가라앉았고 뒷좌석에서 핸드폰에 빠져있던 아이도 기약 없는 도로 사정에 몸을 뒤틀리 시작했다. 점심때를 훌쩍 지나 늦은 오후쯤 겨우 벚꽃 흐드러진 꽃길 속에 들어섰다. 멀리 보면 몽글몽글 연분홍 구름 떼 같고 가까이 보면 하얀 잇속 드러내고 말갛게 웃는 스무 살 아가씨를 닮은 꽃 무더기가 하늘을 덮고 꽃눈을 날리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느 사실주의 고고한 화가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흉내 낼 수 있을까. 한참을 꽃길에 취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 가 문득 그 너머 강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리도 없이 멈춘 듯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모래밭이 고운 살결 드러내고 나붓이 엎드려있었다. 저것이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이겠구나.
내가 어렸을 때 동네를 감고 흘렀던 개천에 넓은 모래밭이 멀리 까지 이어져 있었더랬다. 모래는 맨발로 걸으면 발목이 푹푹 빠졌고 개천은 꽤 깊은 곳도 있어 한 번씩 큰 비가 내리면 동네 어른들은 위험하다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물이 빠지면 군데군데 물풀 무더기를 이루기도 하고 어디서 떠내려왔는지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다니기도 했지만 모래밭은 오래오래 동네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그때 물은 깨끗했고 동네는 조용했으며 개발은 우리와 상관없었다.
어느 날 동네 앞 개천 위로 다리가 놓였다.
그리고 큰 길이 생기면서 내가 다니던 학교로 가는 버스도 그 길을 통해 달리게 되었다. 길은 조금씩 확장되었고 어른들 말을 통해 동네 어디까지 새길이 이어진다느니, 이제 읍내에도 아파트가 세워진다느니 하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잘은 몰랐지만 그때 나는 왠지 우리 동네가 도시처럼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네 개천이 조금씩 말라갔다. 얕은 곳은 이끼가 유난히 많아지고 부글부글 거품이 일면서 지독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엄마는 개울에서 빨래하는 날 보다 집에서 빨래하는 날이 더 많아졌고 할머니가 올갱이를 주우러 가는 날도 점점 줄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모래밭을 찾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몇 해 뒤 고향을 떠났다.
내 눈은 어느새 섬진강변 모래밭 속에 묻혀 벚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장 고향에 한 번 다녀오지 않으면 생병이 날것처럼 우리 동네 개천이 궁금해졌다. 그 민물 냄새와 한 여름 햇빛에 쨍쨍이 달구어진 모래 속에 묻혀있던 내 발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몇 주 후 나는 남편과 그토록 바라던 고향에 갔다. 마음은 설렜고 자꾸만 이유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집은 도로 확장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풍성한 금발처럼 반짝였던 모래밭은 거짓말처럼 없었다. 멱을 감고 빨래를 하고 올갱이를 줍고 물고기를 낚던 개천은 힘없는 노인처럼 쪼그라져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도 없다. 나의 낙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조용하던 마을에 당연한 순리처럼 개발의 광풍이 몰아쳐 공장이 들어서고 논밭이 깎여서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수영장을 비롯한 각종 센터가 줄줄이 지어졌다. 땅값은 올랐고 그 땅으로 한몫 잡으려고 설치는 외지인들이 고향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세련됨으로 치장된 새것이 오래도록 동네를 지켜준 익숙함을 무시하고 개발이란 명목 하에, 마땅히 보존해야 할 자연 따위는 촌스러움으로 간주해서 밀어버렸으며, 그곳에 카페와 펜션을 들이밀었다. 낙후된 지역에 고급 상가가 형성되면서 원주민들이 밀려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뉴스를 오래전에 보면서 씁쓸했었다. 새것은 다 좋은 것 마냥 새 건물이 들어서고 새로운 문화가 들어서고 그 새로움은 결국 사람도 밀어낸다. 나의 낙원은 새것에 밀려 어디로 흘러가버렸을까. 개천의 풍경은 이제 기억으로 박재되어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저장돼버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동네를 뒤로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챙겨 다시 차에 올랐다. 예전엔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넘던 재는 옛길이고 이제는 고속도로 가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오가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직은 구석구석 시골의 정취가 남아있다. 너만은 부디 밀려나지 말고 버텨달라고 바라본다면 나는 이기적인 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