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숲길을 함께 걷는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적당히 따뜻한 날이 그랬고 걸을 수 있는 몸과 편안한 마음이 그랬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이야기를 타고 애틋함이, 각자의 삶을 향한 무한한 응원이 건네졌다가 되돌아왔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있다.
10년.
친구의 연락이 왔다. 혹시나 기다렸던 시간이 지났고 어쩌다 마주하는 우연도 없겠지.
그런 세월이 흘렀다.
전화기를 타고 흐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우리는 어제도 만났고 내일도 만날 사람들처럼 잔잔하고 편안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이야기했다.
“일이 많았어.”
시간을 압축하는 그저 그런 표현에 가슴이 꼬집는히는 것처럼 따끔거린 건 왜였을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어.”
“아.”
“그리고 k가 투병 중이야.”
“!!”
우리의 10년은 그랬었구나. 우리는 친정엄마가 떠나셨음에도 서로를 찾지 않는 관계가 되었고 독한 병마와 싸우는 친구의 소식을 이제야 듣게 되는 그런 사이가 돼버렸구나. 서로의 부재 속에서 시간은 관계를 새롭게 규정해 버렸다. 서운함이 가슴에 배어갔다.
y의 전화는 당연한 듯 k에게 이어졌다.
“k야”
간신히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는 왜 이토록 아픈 몸으로, 왜 이제야 너의 이름을 부르게 했는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기대고, 의지했던 시간이 무너진 건 참 사소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인연을 끊듯 살았다. 그런데도 나는 늘 그 애를 생각했다.
끊어진 인연 속에 그 애는 뾰족하게 자란 가시처럼 가슴에 콕 박혀있었다.
“ k에게 가자.”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마주하고 섰다. 밀어버린 머리를 감춘 k와 언제나 조용히 그 애 곁에 있어 준 y를 본다.
y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옅은 바람이 생각난다. y는 늘 잔잔했다. 나는 그 애가 호들갑스럽게 들뜨는 것을 본 적이 없다. 5월의 나뭇잎을 반짝이게 하는 바람처럼, 언덕 아래 가지런히 풀을 눕히는 바람처럼, 그 애는 늘 조용히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 같았다. 그 애 앞에 있으면 우리는 파도가 잦아드는 바다처럼 가만가만 그 애가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물결을 만들었다.
K를 보며 돌다리 앞에 선 어린아이를 떠올린다. 개울을 건너려고 주먹을 쥐며 용기를 내보는 꼬마가 있다. 개울은 깊고 돌다리는 울퉁불퉁하다. 겁먹은 마음을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두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이 젖은 아이를 본다. 돌다리 위에 발 하나를 올린 그 애를 응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목청껏 소리 질러본다. 조심조심 건너봐. 넌 할 수 있어!!
삶은 우리를 자주 우회하며 걷게 한다.
우회한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 나는 삶이 늘 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음에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회한 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뜻하지 않게 얻어낸 선물도 있었다. 그때는 이 길로 돌아오게 한 순간에 감사했다. k의 삶이 비록 원치 않는 방향으로 꺾어져 있지만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감사가 함께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애가 걷는 그 길에 신의 뜻이 있어 주기를. 돌아온 그 길이 선물이었기를.
낯선 길을 홀로 서성이는 그 애의 손을 자꾸 잡아주고 싶었다.
나는 그저 잘 버텨달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돌아섰다.
“또 올게 ”
조용히 손을 잡아주고 뒤돌아서는 y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k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내 등 뒤에 선 그 애들 때문에 난 늘 따듯했다고. 삶이 가끔 어이없게 우습기도 했고, 막돼먹은 상황에 고꾸라질 때도 있었지만 내 등 한구석이 따뜻해서 위로받고 있었다고. 내 등이 다시 따뜻해지길 바랐다고.
내 삶에 아주 작은 등 하나가 다시 불을 켰다. 나는 중얼거린다.
너는 매일 내 맘을 자라게 해주는 따뜻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