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9) : 고대 스파르타의 토지사상(ii) -
토지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대부분의 스파르타인들은 생계도 제대로 유지하는 빈곤계층이 되었고 당연히 군역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그렇기에 군사동맹으로 가까스로 강국의 자존심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 스파르타만의 순수 국방력은 대폭 감소되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한 스파르타는 한 세기 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얻었던 그리스 패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기원전 369년에 속주 메세니아까지 독립함으로 과거의 넓은 영토와 경제력을 영영 되찾지 못했다. 그 전쟁 때문에 빈민이 된 이들은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아 줄 것을 염원하며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1] 그들의 기억 속에나마 아직도 토지주권사상이 남아있었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허나 스파르타 시민들은 직접적으로 농경을 하지 않고 군사 업무 등에만 몰두하는 이들이었기에, 메세니아가 독립함으로 그에 속했던 헤일로타이[2]가 해방되어 스파르타의 경제는 반 토막이 났다. 심지어 그쪽 땅이 특히 비옥했다. 그만큼이나 땅에 기반한 경제력을 잃은 시민들은 자연스레 그 시민권을 박탈당하니 시민들의 수도 급감했다는 것이 스파르타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언급했듯 토지를 가진 자만이 시민이고, 시민만이 군역을 이행하는데, 이젠 다들 토지가 없어 군인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시민권을 잃어가고 있었기에, 그 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대지주들의 토지 재산 증식은 더욱이 거칠 것이 없었다. 한편 장인 및 수공업자 등 노동으로 먹고 사는 계층 또한 생계유지에 벅찰 정도로 임금이 하락했다는 것은[3] 단지 지주시민 계층의 내부에서만의 토지양극화가 발생하고 생활 수준이 하향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 계층에게 해당되었음을 말해준다. 시간이 흐르며 국토 전체에서 차지하는 국공유지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국방비가 늘어난 것도[4] 또 다른 국력 쇠락의 원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국공유지가 넓으면 이에서 나오는 생산물 등으로 국방비를 부담할 것이지만, 이를 소수가 독점하면서도 그가 더 많은 국방을 책임지기로 하지 않으면 즉, (토지 소유의)권리만을 취하고 (지주의)의무를 회피하면 공공 예산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시의 토지주권사상, 토지평등사상, 그리고 군역토사상의 퇴색과 그 비참한 결과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토지양극화로부터 촉발한 스파르타의 멸국은 그리 머지 않았다.
이렇게 완전히 토지사상이 바뀐 이후의 토지제도와 이로 인해 바뀐 사회상은 되돌릴 수 없었다. 기원전 3세기 중엽의 왕 아기스 4세(기원전 265~241)는 토지재산의 평등을 위핸 개혁이 영광스러운 과업이라 생각하여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즈음에 시민권을 가진 가구가 고작 700가구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할당지를 보유한 이들은 겨우 100가구에 불과했다.[5] 과거에 옛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할당지에서 대해서는 더욱 엄히 매각을 금했었던 시절은[6] 이제 추억에 불과했고 또 다른 왕 레오니다스 2세와 대지주 여성들은 아기스의 개혁을 방해했다.[7] 그들이 목도하고 있는 상황은 옛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사상으로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20세기에 그려진 아기스 4세 상상도(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gis-IV)
당시의 현실이 문자 그대로라면 감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토지양극화와 이를 둘러싼 갈등의 시기였다. 오직 토지를 기반으로 한 소수 지배층만이 번영했고 반대편 빈민층은 생계유지조차 어려웠다.[8]
그 결과 권력자들은 정당하게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그 권리를 빼앗음으로써 토지를 무제한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모든 재산은 소수 권력자에게 집중되고, 시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비루하게 돈벌이를 했고, 부자들을 질투하고 증오하게 되었다.[9]
아기스는 국가의 땅에 4,500필지를 마련하여 당시 턱없이 부족했던 (시민권을 가진)시민의 수를 늘리려 했으나 물론 대지주에 속하는 이들과 그 부녀자들과 그리고 정치사회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위정자들은 토지개혁에 크게 반발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빚 탕감에는 성공했다. 허나 문제의 핵심을 뿌리 뽑는 근본적 해결책인 토지개혁은 간사한 아게실라오스라는 인물이 아기스를 사주함에 따라 계속 지연되었다. 결국 아기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기원전 241년에 레오니다스 2세에게 숙청당한다. 이제는 일반 민중은 새로운 지주가 생겨날 수 없는 구조로 ‘변질된’ 현재의 리쿠르코스 제도가 정상 상태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10]
당시 스파르타의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그 6년 후 레오니다스 2세의 아들이자 당시 어린 나이의 클레오메네스(기원전 260~219)는 사망한 아기스의 아내였던 아기아티스와 결혼했다. 비록 군사력 증진을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녀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와는 반대의 노선을 택했다. 즉위와 함께 토지양극화 해소를 포함한 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옛적 리쿠르고스의 토지개혁과 당시 스파르타의 영광에 대하여 연설하고 토지는 시민 모두의 재산이라고 주장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하였고 자신을 포함한 최상위 계층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내놓으며 토지재분배를 통해 4천의 군사를 양성해내는 성과를 냈고, 개혁 덕분에 국력이 강해졌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11]
허나 훗날 마케도니아-아카이아 연합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집트에 망명한 후 기원전 219년에 사망했다. 그의 부재로 인한 개혁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가 토지 분배에 성공했다고 평하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그가 사망한 다음 년도에도 케일론의 토지개혁이 일어났기에 거의 실패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다. 케일론도 반란을 통해 토지재분배 개혁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스파르타의 마지막 왕 나비스(기원전 207~192)도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노예를 해방시기코 부자를 국외로 추방했으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빈부격차 및 토지불균형의 해소보다는 클레오메네스처럼 군사력 강화에 있었다.[12]
후에 나비스가 퀸투스 플라미니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그에게 던진 말은 토지법제사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매우 크다.
스파르타인에게 그대들의 법제를 따르도록 요구하지 마시오. ⋯⋯ 그대들은 재산 자격에 따라 기병과 보병을 뽑고 있으며 소수만이 남보다 부를 누려 일반 인민이 그들에게 복종하길 바라고 있소. 우리들의 입법자는 국가가 소수자, 곧 그대들이 일컫는 대로 원로원의 수중에 있는 것도, 어느 특정 계급이 국가에서 우월권을 갖는 것도 바라지 않고 있소. 반대로 재산과 지위의 평등에 의해 다수가 국방의 의무를 나눠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소.[13]
그가 남긴 말에서 간접적으로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기원전 2세기까지도 스파르타인에게 소수가 많은 재산을 독차지하는 빈부격차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는 점에서 토지평등사상의 잔존이다. 두 번째로는 재산 수준에 따라 국방 의무를 져야한다는 점에서 군역토사상이 잔존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기원전 2세기에 이미 로마 사회는 스파르타보다 더욱 토지를 거의 독점한 지주 계층이 그 외 사람들을 경제사회적으로 자신들에게 종속시킨 사회라는 것이다.
그리스를 대표하던 두 폴리스 중 하나였던 군사강국 스파르타는 그렇게 기원전 192년에 아카이아 연맹에 흡수되었다. 11년 후에는 젊은 개혁가 카이론은 민중의 지지를 받아 스파르타 역사상 마지막 토지개혁을 통해 빈민층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14]
허나 반 세기 후에는 기원전 146년부터 당대 지중해 최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토지사상과 토지제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본 스파르타의 역사를 정리해보자. 초기에는 명백하게 군역토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이 있었다. 허나 약 기원전 5세기를 지나며 그 올바른 사상과 제도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소수가 토지를 독점하는 토지양극화 문제가 크게 발생하였다. 기원전 4세기부터 군역에 가담하지 않는 계층이 두터워지고 그 토지양극화로 인해 토지를 잃은 무산자 계층이 두터워지며 국방력이 크게 감소하였다. 지주권의 강화로 인해 토지양극화는 질적으로도 더 심각해졌다. 기원전 3세기에 할당지를 가진 가구는 100개뿐일 정도로 토지양극화는 극에 달했고 이를 해소하려 다음 세기까지 여러 차례 토지개혁이 있었으나 멸국을 막지는 못했다.
몇 개의 글 이후 이어질 내용인 고대 로마를 살펴보면 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때리거나 쇠고랑를 채우는 등, 토지 소유주가 비소유주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합법인 시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교하자면 스파르타는 아직 양반이랄까.
이는 단순히 옛 역사가 아니다.
절대적, 무한적으로 부동산 소유를 허하고 그 소유주에게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는 21세기 부동산제도 아래에서 우리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잘못된 부동산제도로 인해 멸국했던 스파르타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21세기의 부동산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옛적 올바른 토지사상을 깨끗히 잃어버린 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헤일로타이(Heilotai) : 국가 소유의 노예. 공유 재산으로 여겨졌으며 거의 항상 스파르타 시민보다 인구가 많았기에 가혹한 억압의 대상이었다.
[3] W. W. Tarn, The Hellenistic Civilization3(London, 1952), pp. 117~118, 121~125; P. Oliva, Sparta and Her Social Problems, p. 209;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101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