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8) : 고대 스파르타의 토지사상(i) -
3-4 :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본 그리스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지주들이 모여 폴리스를 형성하고 위와 같은 체제를 만들었다. 그런데 8세기는 폴리스의 형성기뿐만 아니라 농경 기술이 드디어 그리스 전역으로 널리 퍼진 시기이다.[1] 언급했듯 토지보유의 여부는 시민권뿐만 아니라 부와 직결되기 때문에 농경사회로의 본격적 진입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대되자 토지 및 농경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2] 토지사상과 토지제도는 또다시 큰 변화의 바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 아테네, 스파르타의 토지제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시대상을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두 폴리스가 가장 대표적인 폴리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국가라고 볼 수 있고 반면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라고 볼 수 있고 더욱 중앙집권적이기에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그 차이 속에서도 두 체제의 토지사상 및 제도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스 문명 전체를 관통하는 토지사상을 살펴보기에 최적의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를 평정하고 그리스 문명과 지식을 유럽에 전달한 로마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폴리스들에 사절단을 보내 법을 배워 공화국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그 이후 거의 1천 년의 시간이 지나 5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5~565년)가 편찬한 <학설휘찬(Pandekten)>에서도 그리스 법들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있을 정도다.[3]
스파르타
먼저 스파르타를 살펴보자. 스파르타인들은 미케네 문명의 파괴자인 도리아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고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폴리스와는 달리 기름진 평야가 있어 자급자족이 넉넉히 가능했다. 때문에 더욱 농업에 기초한 국가이고 그 기반 위에 상공업이 발달하였지만 아테네에 비해서는 그만큼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폐쇄적인 폴리스였다.
그들의 토지주권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기록은 아래와 같다.
아버지는 아기를 키울 권한이 없었으며, 그는 아기를 lesche라는 장소로 데려가서 거기 앉아있는 부족의 장로들이 그를 검사한다. 만일 신체가 건강하고 튼튼하면(eupages eiē kai hrōmaleon), 그들은 아버지에게 양육을 명령하고, 9,000개의 클레로스 가운데 하나를 그(아기)에게 할당해준다. (후략)[4]
한편 클레로스가 ‘추첨’이라는 의미도 있어서,[5] 적어도 토지를 분배하던 초기에는 누군가의 손이나 의도가 아니라 운에 따른 토지 분배를 실시하여 분배 받을 자들이 같은 출발선에 놓이게 했다는 점에서도(그나마 인위가 덜한 방식임으로) 토지평등사상이 상당했음이 드러난다. 당시 농업이 경제의 전체나 마찬가지였던 시대에 스파르타는 다른 폴리스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평등의 수준이 높았는데 이 또한 그러한 토지평등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남성이 지주로서의 의무(국방)를 이행하였다는 점에서는 군역토사상이 확인된다. 꽤 극단적이긴 하나, 스파르타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7살에 모종의 군사학교인 아고게(Agoge)로 들어가 아주 혹독한 군사 훈련을 받았고, 20살 성인부터 목숨을 걸고 참전하여 60세가 되어야 군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지 않는 한 ‘토지를 소유한 스파르타 시민’은 일평생 군역토사상의 매우 절대적인 구속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군역토사상에 대하여 이외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스파르타는 오래동안 그리스 지역 최강의 군사강국으로 호령했는데, 그 결정적 비결은 바로 이에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시 여겨, 승리 후 신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을 바쳐봤자 고작 수탉 한 마리를 바칠 뿐이었고 패배하면 아내와 딸 앞에선 차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6]
영화 <300> 속 한 장면.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LEGNEDARY PICTURES, 2007.)
허나 마치 미케네 문명처럼, 고대 기록 그 어디에도 그 할당지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환수가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나 사료가 없다는 점에서는[7] 훗날 발생할 수 있는 토지양극화의 여지가 아예 부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일반적인 민중과는 달리 귀족들은 매매 및 처분도 가능한 땅을 일부 보유할 수 있었고[8] 그에 해당하는 토지 소유가 점차 비대해졌다.[9] 이에 따라 토지양극화가 표면으로 떠올랐고 기어코 기원전 8세기경, 이를 타파하기 위해 리쿠르고스(Lycurgus, 기원전 800?~730?)가 개혁을 실시하였다. 아래의 역사 기록을 보면 그 배경, 그 결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토지 분배는 매우 불평등한 상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지를 전혀 가지지 못한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손에 많은 토지가 집중되어 있어서 교만과 시기와 사치와 범죄 등 온갖 악폐가 생겨나고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국가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빈부의 차이를 없애기 위하여 국민들에게서 토지를 모두 거두어들인 다음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골고루 분배받는 일에 동의하도록 했다.
그래서 부자들도 다른 사람과 같은 기반 위에서 살며, 다만 용기와 덕으로 명예를 얻도록 했다. 그래서 경제적 여건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하였으며, 오직 개인의 용기와 덕에 따라서만 사람들은 차이를 따질 수 있게 되었다. 부자들이 이 제안에 동의하자 그는 라코니아 지방의 토지를 3만 필지로 등분하여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략)[10]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의 얼굴 상상도(Clipart.com.)
리쿠르고스 개혁에서 토지법제사적 골자는 첫째로 지나치게 많은 토지를 가진 자의 토지를 일부 환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해주어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위 인용구에서 문자적으로 확인되듯 그 개혁에 부자들도 동의했다는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몇 부자들은 그에 반감을 품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나[11] 전체적으로는 만민이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의 강력한 구속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토지 매각을 엄격히 금하여 차후에 재발생할 수 있는 토지양극화를 방지했다.
둘째로 모든 시민은 군사 훈련에 반드시 참여하게 하였다. 이 개혁에서 당시 스파르타의 엄격한 토지주권사상, 토지평등사상, 군역토사상의 부활 의지가 담겨있었며 개혁 결과에 따라 토지양극화는 상당 수준 해소되었다.
위와 같은 스파르타 초기의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허나 스파르타의 토지양극화의 조짐은 그 개혁 이후 약 2~3백년이 지나 기원전 5세기에 다시 싹을 틔웠다. 스파르타인들은 기원전 5세기 말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을 승리로 마무리하였으나 이후 화폐경제로의 전환으로 지주들의 타인의 땅을 매입하는 것은 더 원활해졌다.[12] 본격적으로 화폐경제로 전환됨이 따라 자연스레 검소함을 내세웠던 과거는 사라지며 부의 축적과 귀금속 보유를 금지하는 전통은 형식으로만 남았고, 당연히 토지를 포함한 거대한 부는 자랑거리로 자리가 되어 그 결과 토지양극화가 기어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13]
아테나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과 페르시아가 지원한 전쟁보조금으로 잉여의 부를 손에 쥔 스파르타인들은, 상업과 금융 등이 발달한 아테나와는 달리 토지 외에 투자(투기)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함으로 인해 당시 스파르타에서 가장 믿을 만한 으뜸 자산은 오늘날과 같이 토지였다는 것도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14] 시대가 흐르면서 토지평등사상이 퇴색되고 부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소수의 부유한 자들은 자연스레 더 큰 토지를 탐냈다. 토지 수요는 과열되었다.
무엇보다 이를 한층 더 심화시킨 결정적인 그 다음 세기인 기원전 4세기에 발생했다. 스파르타의 ‘에피타데우스(Epitadeus)’라는 이름의 감독관이(플루타르코스의 『아기스』에만 언급되는 인물로서, 가상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음) 새 레트라(스파르타의 헌법이자 불문법)를 제정하고 토지를 생전이나 유언으로나 임의로 증여 및 상속이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15] 당대를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매는 여전히 불가했다고 하지만[16]우회적인 방법으로나마 사실상 토지 양도 및 상속은 가능해졌다고 밝힌다.[17] 에피타데우스법 제정 이후부터는 채권자들은 채무자들로부터 수확물이 아니라 토지 자체를 받는 것은 합법화된 덕분이었다.[18]
이렇게 아내나 딸에게 토지를 생전 증여 및 유산 증여하거나 딸의 혼인 지참금으로 증여하는 편법 또한 성행함에 따라 이전 및 증여를 가장한 매매 등등,[19]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토지 소유의 자율성이 증대되었다. 고로 지주권의 강화(질) 측면에서 보나, 토지 보유량의 격차(양) 측면에서 보나 토지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경제사회에 미친 악영향으로는 전체 인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토지를 가진 시민의 수가 줄어들어 국방력이 약해졌다는 것, 복지의 개념을 가진 공동식사(시시티아)제도 및 공교육 제도의 퇴색 등이 있었다.[20] 이러한 상황을 두고 테베 침공이 있었던 기원전 369~362년 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탄하기를, 스파르타 전 국토의 40%가 부녀자들의 땅이 되었고, 1500명의 기병과 3만 명의 보병을 꾸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이 고작 1천명도 안된다고 했다.[21]
불필요한 젠더 갈등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필자는 독자들에게 ‘부녀자들’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토지 재산을 가졌으나 공익에 기여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함을 말해두는 바이다. 아무튼, 수치 표현이 과장되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고려해도 그리스 문명 내 최고의 군사강국이었던 스파르타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멸국을 앞둔 상태였음은 불명했다.
기원전 5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사(Historiae)』를 기록할 때의 약 8000명에 이르렀던 시민의 수와 비교해 보면 문자적으로 한 세기 만에 국방력이 1/8로 축소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고르틴 법의 조항과 대비되는데 왜냐하면 본래 토지는 공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소유자로 하여금 공익의 기여해야 할 의무를 부과했으나, 수백 년이 지나며 그리스인들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의 변화로 인해 그 특성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마치 동산처럼 무제한으로 소유하도록 하며, 그 소유주에게 사회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으며, 권리만 취하도록 하면서 스파르타는 양극화 문제와 멸국에 치닫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역사가 아니다. 오늘날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올바른 토지사상을 잃어버림에 따라 결국 멸명하게 되는 내용은 (ii)에서 계속된다.
References
[1] Homer, The Illiad, pp. 36~47; 변정심, “고대 그리스 폴리스(Polis) 형성 과정에서 영웅숭배의 역할”, 「서양고대사연구」26(2010.6), 153쪽에서 재인용.
[2] Homer, The Iliad, pp. 23~26, pp. 38-40; A. M. Snodgrass, An Archeology of Greece, pp. 160~165; A. M. Snodgrass, “The Archeology of the Hero”, pp. 180~190; A. M. Snodgrass, Archeology and the Emergence of Greece, pp. 214~257; 변정심, 전게서, 153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