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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2. 2021

21세기 귀족(10)

고대 아테네의 토지사상(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0) : 고대 아테네의 토지사상(i) -




아테네


먼저 스파르타와 비교하여, 극명한 차이점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8~7세기부터 토지양극화를 해소하려 수많은 토지개혁과 정책을 펼쳤지만, 아테네는 이렇다 할만한 토지개혁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유명한 솔론(Solon, 기원전 630~560)의 개혁도 토지 재분배를 실행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어떠한 토지법제사적 배경과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던 폴리스이기에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토지공개념, 토지평등사상, 토지주권사상, 군역토사상이 아예 부재했던 걸까?


아테네의 가장 대표적 명승고적 '파르테논 신전'(Photo : Mark Carwright)


아테네 땅에는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정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암흑기를 지나 8세기에 지방 실력자들인 바실리우스들이 아테네 왕 테세우스(Theseus)로부터 권력을 나누어 받고 아테네 초기 귀족계층(에우파트리다이, Eupatridai)을 형성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왕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되어 스파르타보다 더욱 뚜렷한 귀족의 의한 정치(귀족정)를 실시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차이점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정복 전쟁 이후 얻은 땅을 공평하게 나누었고 초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생활하였던 것에 비해, 아테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거의 모든 땅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소수가 있었던 것이다.[1]


따라서 바실레우스의 후손들인 ‘소수’의 지주 귀족들만이 국가에 기여할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다행이나마 그들은 국방비를 충분히 감당할 경제력이 있기도 하고, 그러한 공익 기여가 인민들에게는 폴리스에의 봉사와 명예로움으로 비쳤고 아직 법이 민중을 보호할 만큼 발달하지 않아 귀족들은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아래 인민들로부터의 지지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2] 토지 소유자는 다른 가난한 이들을 경제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역토사상이 확인된다.


아테네의 토지공개념은 지주층의 철저한 군역 이행으로 충분히 확인되지만, 그 외 경제생활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수준한 수준임을 다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솔론이 법을 제정한 바는 우물을 가까이 이용할 수 있는 자는 그 우물을 이웃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토지 위에 나무를 심을지라도 이웃 토지와 일정 간격을 두어야 하며, 고지대에 토지가 있는 자는 저지대에 홍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선을 다해 조치하게 했다.[3]


둘째로, 정치생활단위(데모스)나 부족 차원에서는 전시 등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임대인은 임대료를 절반으로 낮추도록 규정하는 법이 있었는데 이에는 임대인 즉, 지주가 공동체의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드러난다.[4] 재해로 인한 흉작에 대하여 지주가 상당 부분을 부담을 지게 하여 그의 채권 및 지주권에 제한을 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함무라비 법전>의 46조와 48조가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와 임대료 납부에 차질이 생긴 임차인을 보호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셋째로 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에는 임차인에게 막대한 부담을 지게 하는 법에서도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임차인에게는 큰 경제적 책임이 뒤따르겠으나 이러한 토지는 상당한 규모이기에 부유한 사람만이 임차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국유지 및 공용지에서 나오는 지대가 공익을 위해서 쓰이다가 임대차계약 이후에는 임차인 사익으로 귀속된다는 점에서, 임차인의 이러한 큰 부담은 토지공개념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게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서는 공공의 재산을 임대했음에도 임대료 납부를 지체하면 임대료의 두 배를 내야 했고, 아홉 번째 프리타네이아(1년을 10개의 행정적 기간으로 분할해 놓은 것) 때까지 납부하지 하는 경우에는 해당 임차인과 보증인의 재산을 매각하여 미불 임대료를 충당하며 납부할 때까지 구금 조치했을 정도다.[5]


위와 같이 여러가지 배경 덕에 소수의 지주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현상은 로마에도 있었다. 토지 재산이 아주 조금 밖에 없는 가난 로마 시민들은 참정권도 사실상 전혀 없는 것에 가까웠지만 병역 의무와 세금을 면제 받았던 것이다.[6]


한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려워 상공업과 다른 폴리스와 경제적 교류 및 항구무역으로 발전한 폴리스였다는 점이, 일반 노동자계층도 농경 이외의 업으로 충분한 재산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따라서 로마의 하층 시민들도 정치권력의 차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었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크게 발달한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의 현재 모습(Photo : Alaniaris)


위와 같은 물질적 배경이 만들어낸 아테네 사회상은, 소수 지주들은 고대적 토지사상에 입각하여 국방 등에 공익적 기여를 했지만, 토지평등사상의 요구 및 이를 반영한 토지개혁이 없었던 사회상이다. 토지평등사상이 상대적으로 스파르타보다 약했기 때문에, 상속받은 토지가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매입한 토지에 대해서는 처분의 자율성이 더 컸다.[7] 이러한 배경은 자연스레 토지양극화의 여지를 열어주었다.


8세기가 지나며 그리스 전체적으로 토지의 부족 문제와 갈등이 표면에 올라왔는데,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 제도에 의한 토지개혁의 방향성과는 달리, 식민지 개척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모색했다. 허나 양극화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기원전 7세기 후반에 대부분의 토지는 귀족들이 소유하기 시작했고 곧 기원전 6세기에 들어 더욱 심해져 명백하게 토지양극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8]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채무를 진 채무자로서 신음했고 인신을 저당잡힌 사람들은 노예가 되거나, 자식을 노예로 팔거나, 외국으로 도망가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노예 해방과 토지재분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9] 민중이 토지재분배를 요청했다는 부분은 당시에도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이 뚜렷이 잔존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토지 없는 빈자가 훗날 토지를 가진 부유한 자의 노예가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특히 토지뿐만 아니라 그 외 동산도 변변찮은 극빈자들은 자신 혹은 자녀의 인신을 저당잡히고 부자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대출 이후에도 변함없이 토지가 없으니 일정한 소득이 없어 그 빚을 제때 갚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의 종착지는 노예로의 전락이었다. 이에 불을 붙인 격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귀족들의 전횡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민중이 불만이 고조되었으나 이를 해결한 제도나 법이 없었다.[10] 이같은 정치경제적 혼란이 지속되어 킬론(Cylon)과 같은 이들이 참주로 등장하려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기어코 기원전 594년에 귀족과 민중 양쪽의 합의와 지지를 얻어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켜 혼란을 종식시킨 이가 바로 그 유명한 솔론이다. 솔론의 개혁의 내용은 빚 탕감, 인신담보 금지, 토지의 경계석(주로 아테네에서 토지저당이나 반환매매를 공공에 알리기 위한 장치)의 제거로 헥테모로이(자유인 신분이지만 토지 없는 예속적 소작인)의 해방과 그들의 토지경작권 및 소유권 보장, 드라코법 대폭 개정과 새 법률 제정, 평의회 신설, 도량형 개정, 토지와 그 생산의 수준에 따른 의무와 권리를 규정한 4개의 시민등급 설정, 평민 참정권 확대 등의 파격적인 것들이었다. 허나 스파르타의 개혁가들과 비교하였을 때 그의 개혁에서 매우 특이한 점이자 토지법제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 그가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소수 귀족과 서민 간의 토지양극화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토지재분배 및 토지개혁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론(photo : kpjas)


그렇다고 해서 토지공개념, 군역토사상이 매우 희미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위 솔론의 개혁으로 인한 시민의 4등급 구분에서 그 구분에 따른 국방 등의 의무이행 수준을 차등 부담시켰다는 점에서 군역토사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훗날 참주정 시기 간, 약 기원전 6세기경에 폴리스의 군사조직의 변화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주요 전투력을 담당했던 중장보병(hoplites)은 오직 시민들 중에 중산 농민들 즉 경제적으로 넉넉한 지주들로만 구성되었으며 무장에 소요되는 비용을 전부 자신의 비용에서 치렀고, 시민들 중에 테테스(thétes)라고 불렸던 빈농 혹은 일용직 노동자 계층은 군역의 의무가 거의 없었다.[11]


아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서, 지주들의 무기 소지의 의무와 군사 훈련에의 참여 의무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군역토사상은 명백히 확인되고 관직 취임 등 공공 업무에 관련한 역토사상도 뚜렷했음은 확실하다. 적어도 그가 활동한 기원전 4세기 중반까지는 말이다. 종교적 봉사도 이에 포함된다.[12]

 

의회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결석에 대한 벌금은 부자에게만 내려지거나 아니면 훨씬 큰 액수의 벌금이 매겨진다. 관리직에 대하서는 일정한 재산 요건에 의하여 자격을 갖춘 자들은 어떤 핑계를 대도 관리직을 거절할 수 없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법정에 대해서도 부자들은 결석하면 벌금형을 받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결석을 해도 아무 벌도 받지 않는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부자들은 무기가 없으면 벌금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은 신체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도 벌금을 받지 않는 반면에 부자들은 벌금을 받는다.[13]


부자들은 무기를 소지해야 하는 모종의 법적 의무가 있었음에 주목하라. 고대인들의 재산이 대부분 토지였음을 고려하면, "부동산 재산이 큰 사람들은 국가 공동체를 위해 더 큰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현대 부동산제도는 어떠한가? 부동산 소유에 무거운 책임과 의무는커녕 권리만을 누리게 하고 있잖은가?


왜 고대인들은 현금 소유, 농기구 소유 등등과는 달리 부동산 소유에만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좀 길어질 예정이다.



아테네의 토지사상의 변화는 (ii)로 이어진다.




References


[1] 송문현, “헥테모로이와 토지보유의 형태 - 솔론의 개혁 재검토”, 「서양고대사연구」1(1993), 1~4쪽.

[2]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20~23쪽.

[3] A.R.W. Harrison, The Law of Athens I,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p. 249~250;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163쪽. 원문에서는 Plutarch, Solon.

[4] Inscriptiones Graecae. Berlin, 1890ff, II2, 2492, 1,12~14; 최자영, 『고대 그리스 법제사』(아카넷, 2007), 526쪽에서 재인용.

[5] 최자영, 전게서, 552쪽.

[6] Dinoysius of Halicarnassus, Rhōmaïkḕ Arkhaiología 4, 21, 2;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299쪽에서 재인용.

[7] Harrison, 전게서, pp. 125, 233.

[8] Powelson/정희남 옮김, 『세계토지사』(한국경제신문사, 1998),  70쪽.

[9]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154쪽. 원문에서는 Plutarch, Solon.

[10] 김진경 외, 전게서, 26쪽.

[11] Anderson/유재건 & 한정숙 옮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현실문화연구, 2014), 40쪽, 48쪽.

[12] Harrision, 전게서, p. 130.

[13] Aristotle/손명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16), 404~405쪽. 원문에선 Politika,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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