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1) : 고대 아테네의 토지사상(ii) -
아테네도 스파르타인들처럼 법적으로 시민들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토지 소유에 따르는 세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는 동시대 로마나, 후에 등장할 중세초 유럽 국가들처럼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토지 소유에 따르는 세금은 군역으로써 대신 납부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솔론의 개혁에는 토지평등사상의 부활을 내용으로 한 개혁이 없었기에 이후에도 영세민들이 채권자에게 빚을 갚지 못하였을 경우는 토지를 넘겨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귀족들의 힘에 억눌린 일부 하층민들은 변함없이 경제사회적 상황의 개선에 대한 필요는 여전했으며 이에 따라 두 계층의 각 불만은 잔존했다.[1]
이에 대한 강력한 방증이자 주목할 만한 사건은 솔론 개혁 이후 반 세기가 지나서 등장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기원전 600?~527)라는 인물과 관련된 사건이다. 그는 두 번이나 아테네에서 추방을 당하고도 힘을 모아 군사력을 동원하여 아테네로 재진입하여 기어코 참주로 등극한 자였다. 철저히 소외된 하층민들의 지지와, 기존의 평야파(Pedioi)와 해안파(Paraloi)가 아닌 신흥세력 산악파(Hyperakrioi)의 지지를 힘입어 20년 가까이 참주로서 아테네를 통치하며 펼친 정책들 중에는 이른바 농상공의 중흥을 위한 정책도 있었다.[2]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로 재진입하는 광경에 대한 상상도(M. A. Barth - 'Vorzeit und Gegenwart", Augsbourg, 1832.)
그 중에 농업에 관련한 정책이 흥미롭다. 전국적인 규모로 토지재분배 개혁을 하진 못했지만 자신이 기원전 집권하게 되면서 추방시킨 귀족들의 토지를 땅 없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3] 그 외 귀족들의 땅은 기득권과 어느 정도 타협하는 차원에서 모두 몰수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세력을 누르는 차원으로 아티카에서 수확되는 농산물에 대해 10%의 세금을 걷었고,[4] 이를 빈농들을 위한 농자금을 대여해주는데 썼다.[5]
비록 전면적 개혁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그가 경제적 하층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는 것과 추방시킨 지주들을 빈농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솔론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 토지양극화는 해소되지 않았으며 토지 문제가 부의 격차를 줄이는 데에 최우선적으로 취해져야 할 목표였음을 아테네인들이 알고 있었음을 대변해준다. 더불어 아테네가 스파르타처럼 토지 넓이까지 평등하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을 뿐이지, 그들의 토지평등사상 또한 절대적 기준에선 상당했다. 구체적인 법제는 아래와 같다.
첫째로 동산과는 달리 토지 소유(량)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인데, 다만 정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준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6]
둘째로 국가는 사유지에 대한 개인의 권리의 오남용을 규제할 수 있었고 그 아래의 광물에 대해선 지주가 전적인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는 등, 절대적 수준의 지주권(full rights of ownership)의 행사는 여러 방식으로 제한을 받았다.[7]
셋째로 한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오는 토지 재산(heritable estate)은 가장일지라도 (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자의적 처분에 큰 제한이 있었으며[8] 따라서 기본적으로 토지의 상속은 아들들이 평등히 나누었다.[9] 이는 가장이 자의대로 처분하는 것을 막고 다음 세대의 사람들 모두가 토지를 누릴 수 있게 하려는 취지다. 한편 가장이 사망하였는데 딸만 남겨진다면 그녀와 가까운 친족이 그녀와 결혼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10] 이는 해당 가문의 토지가 다른 가문으로 이동하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즉 특정 가문으로의 토지 집중을 막으려는 취지이다. 근찬간의 결혼이라는 점에서 다소간 극단적이긴 하나 토지평등사상이 엿보인다.
반대로 토지를 포함하여 아내가 결혼할 때에 가져온 지참금은, 그녀가 자녀 없이 사망하였을 경우 남편에게 귀속되지 않고 그녀의 친가로 환수시키는 법이 있었고,[11] 아내와 이혼한 경우 남편이 그녀에게 지참금 또는 그 이자(부동산 임대료 등, 지참금에서 발생한 수익)를 돌려줘야 했다.[12] 동산도 지참금에 해당하지만 고대 사회에서의 자본 증식은 아주 대부분 토지에서 일어나므로, 이러한 법에서도 특정 가문으로의 토지 집중을 막으려는 취지가 엿보인다. 고로 토지평등사상이 확인된다. 한편 이복 형제가 있을 경우 자신의 친어머니가 지참금으로 가져왔던 토지는 그 친아들만이 상속권을 주장하여 아버지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13] 그러한 취지가 드러난다. 다른 폴리스에서보단 상대적으로 여성과 미성년자도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정도였다.[14]
기원전 510년, 아테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시민=지주=군역인=참정권자’이다. 이러한 등식을 정확히 대변하는 격언이자 아마 독자 대부분도 한번 쯤은 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그리스 격언은, “방패 하나에 투표권 하나”라는 말이다. 필자 생각에 이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토지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어구는 없다. 방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군인이었다는 것이고, 군인은 시민 이외에는 될 수 없었고, 당시 값비싼 무기인 방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시민이 일정 수준 이상의 토지 재산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군역을 이행한 사람만이 참정권(투표권)을 행사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아테네는 토지개혁의 역사가 거의 없다. 아테네에선 더이상 토지 문제에 둘러싼 갈등은 개혁이나 봉기처럼 크게 대두되지는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 번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언급했던 바처럼 솔론의 개혁 덕에 수많은 헥테모로이들이 자신들이 경작하고 있던 크고 작은 땅들을 자신의 소유지로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재분배가 아니라 소작권을 소유권으로 전환시켰던 차선책이 적지 않은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이유는 일반적인 인민들 또한 시민권을 가지면서도 상공업자를 제외하곤 작은 땅이나마 다들 지주였기 때문이다.[15] 세 번째 이유는 4세기 후반까지 아테네에서 부동산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된 계층은 거의 외국인뿐 이었다는 것이다.[16]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꽤나 파격적인데, 적법하게 시민권 갖춘 여성이나 미성년자도 부동산과 동산을 소유할 법적 능력이 있었다.[17] 덧붙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농부는 토지의 주인이 되면 노동자 계층보다 더 반항적이다’라는 언급을 한 것으로 보아[18] 흔하진 않았겠지만 타인의 땅을 경작해야 하는 가난한 소작인도 시민권을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토지를 구매하여 새로이 지주가 되는 것이 매우 어렵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 자신의 토지를 팔려고 어디론가 나갔다고 했는데,[19] 이로 미루어보건대 스파르타 등지와는 달리 아테네에선 토지매매 시장도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또한 배타적인 스파르타의 시민권과는 달리 폭 넓게 인정된 아테네의 시민권은 토지 취득의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컸다.
네 번째 이유는 토지 매매가 대부분 환매조건부매매[20]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경계석 중에 저당에 해당하는 경계석은 11개뿐이고, 환매조건부매매에 해당하는 경계석은 무려 122개가 발견되어 거의 대부분의 토지 매매는 이런 형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은 토지를 매각한 이후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다시 사들여서 환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었다.[21] 한편 이는 소수에게 토지가 영구히 집중되는 것을 막는 매매 방식이라는 점에서 잔존하는 토지주권사상 및 토지평등사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테네 경계석(Photo : Craig Mauzy.)
다섯 번째 이유는, 재산에 따라 시민 4개 등급을 나누고 공적 부담도 차등 분배했던 것처럼,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공동체에 대한 더 많은 의무 및 부담을 지게 하는 우회적 돌파구를 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웃들보다 현저히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은 눈초리와 시기의 대상이었고 재산과 권력이 너무 많았던 5세기의 군인 겸 정치가 니키아스는 그로 인해 10년 간 추방당했을 정도였다.[22]
지금의 근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재산이 부러움과 칭찬의 대상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다소간 흥미로운 부분이다. 허나 고대의 경제사회에서 재산이란 거의 전적으로 토지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 토지의 많은 축적은 이웃들의 토지의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랍지 않다. 고대인들에게 많은 토지 재산의 축적은 이웃의 토지 재산의 감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해였기에 눈초리와 시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토지는 희소성이라는 절대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땅을 의미했던 클레로스가 시간이 흘러 기원전 6~4세기 그리스 고전기에 들어서는 토지뿐만 아니라 동산과 채권, 채무 등을 포함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23] 이는 토지와 동산의 뚜렷한 차이와 경계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결국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의 퇴색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초에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의 전쟁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고, 직후 맺어진 델로스 동맹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면서 풍요에 취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앞서 살펴본 전성기의 스파르타인들처럼 약 이 시기부터 아테네의 부자들은 폴리스에의 경제적 기여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오히려 재산을 은닉했다.[24]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그려넣은 와인잔.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인보다 우세하다.(아테네고고학국립박물관 소장)
스파르타와 동일하게 조상들의 토지사상을 상실하고 있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이러한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는 노력을 크게 하지 않았으며 되려 반대의 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사건은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당시 최고의 법적 효력 및 구속력, 그리고 정치사회적 합의를 내포하는 아테네 인민법정(Dikaterion, 신민법정이라고도 함)에서 배심원들이 ‘빚의 탕감과 부동산 재분배를 하지 않겠노라’라는 서약을 한 사건이다.[25]
이렇게 토지평등사상인 한번 더 크게 퇴색했다. 한편 빚은 동산이므로, 빚의 탕감과 부동산 재분배를 금하겠다는 이 서약에서 동산과 부동산의 경계가 희미해졌음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는 향후 수 세기, 2천년 인류 경제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이에 따라 부동산 즉 토지만이 가지는 희소성과 필수성이 희석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미국의 부동산제도를 도입했다. 유럽, 미국의 부동산제도는 고대 그리스-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부동산제도도 고대 그리스-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단순히 필자의 소견이 아니라 법제사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 “방패(의무) 하나에 투표권(권리) 하나”라는 사고방식은 왜 사라졌단 말인가?
도대체, 부동산 소유주가 다른 국민들을 위해서 크게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왜 사라졌단 말인가?
올바른 토지사상을 잃어버림에 따라, 아테네 또한 스파르타처럼 멸국하는 내용은 (iii)으로 이어진다.
[3] Hignett, C., A History of the Athenian Constitution: To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B. C., Oxford, 1967, pp. 114~115; Andrewes, A., The Greek Tyrants, London, 1956, pp. 107~108; 문혜경, 전게서, 21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