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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2. 2021

21세기 귀족(12)

고대 아네테의 토지사상(ii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2) : 고대 아테네의 토지사상(iii) - 


아직 완전히 옛 토지사상들이 소멸한 것은 아직 아니었다. 기원전 4세기 전반에 법정변론가 리시아스(기원전 445~380)는 토지 없는 시민들의 시민권을 박탈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중에서 ‘만약 토지 없는 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이 제정되면 그 수는 5000에 이를 것’이라고 발언한 바가 있었다.[1]


이러한 사건은, 앞서 언급했듯이, 시민이라면 무릇 모두들 토지를 향유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인 토지주권사상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다만 당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아래 주장과 발언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인들의 토지제도가 사유제의 강화 쪽으로 더욱 기울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리시아스의 다음 세대에 활동한 아테네 철학자 플라톤은 토지 공유를 최선(공유재산제)이라는 이상적인 주장을 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토지 사유를 인정하였고 다만 그로 인한 빈부격차와 그 불평등의 수준을 낮추기 위해 형평에 입각한 토지분배정책을 강력히 내세웠다.[2] 재산이 많은 자들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법제도의 제정을 아니꼬와할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던 것이다.[3]


플라톤 흉상(Staatliche Museen zu Berlin—Preussischer Kulturbesitz.)


헌데 플라톤의 제자이자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공유재산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유재산제에 대해 더 강력한 옹호를 내비치고 있다. 동시에 더 구체적으로 토지에 대해 사유지와 공유지로 나누고, 공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공익(공무, 종교, 교육, 공동식사 등)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옳다고 말하며 크레타를 좋은 예시로 꺼내 주장을 강화하였다. 즉, 그는 궁극적으로는 사유지에서 나오는 소득은 개인이 갖지만 공유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공익을 위해 지불하는 ‘사유제와 공유제의 병존(竝存)’을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리고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재산을 공유하는 체제에 연관되어 있다. 만일 관습이나 적절한 법률 시행으로 개선된다면 현재 시행되고 있는 사유재산 체제가 훨씬 나을 것이다. 이 체제는 두 체제의 장점을 모두 갖게 될 것이며 공산 체제의 장점과 사유재산 체제의 장점을 결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재산은 일반적으로 사유제도여야 하지만, 한 가지 점에 대해서는 즉, 그 사용에 있어서 공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재산은 사유로 하되 사용을 공동으로 하는 체제가 보다 나은 체제임이 분명하다.[4]


(중략) 공동식사를 위한 모임의 비용은 크레타에서처럼 공공기금에서 지불되어야 한다. (중략)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매우 가난한 시민들은 공동식사에 참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스파르타 체제의 전통적 규정에 따르면 자기 몫을 가져올 수 없는 사람은 정치적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된다.[5]


(중략) 크레타의 공동식사 제도는 스파르타보다 낫다. (중략) 크레타에서는 제도가 공적인 성격을 띤다. 공유지에서 사육된 가축, 농작물과 농노들에게서 거둬들인 현물은 모두 공동기금이 되는데, 그 중의 반을 종교의식과 공공업무 수행에 사용하고 나머지 반을 공동식사를 마련하는 데 쓴다.[6]


따라서 우리는 국가 영토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후략)[7]


위 주장을 요약하자면, 토지사유제도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토지의 생산물의 일부는 공적인 차원으로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당 부분이 토지공개념에 입각한 주장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인 플라톤을 향해 그가 폴리스 구성원의 재산 중에 토지 재산은 늘리는 것은 허용치 않고 또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은근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것에도 주목할 만하다. 토지평등사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탈피하고자 함은 아래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플라톤은 한 사람의 재산[동산 등]이 5배까지 늘어날 수 있도록 허용한 반면에 왜 토지의 규모는 늘릴 수 없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8]


그리고 토지를 포함한 각종 재산에 관하여 그가 우회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비친 부분이 있는데, 바로 2편 ‘이상 국가에 대한 견해’의 제 7장이다. 그는 칼케돈(Chalkedon)의 팔레아스(Phaleas,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만 등장하는 인물)라는 자가 재산의 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다각도로 평가한다. 7장 말미에 종합적으로 이러한 언급을 남기며 자신의 궁극적 주장을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동의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재산에 평등에 대한 팔레아스의 제안에는 불안전한 점이 또 있다. (중략) 재산을 적절히 평등하게 하려면 마땅히 이 모든 형태의 부를 평등하게 나누도록 하든지, 알맞은 한계를 부과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를 자유방임에 맡겨야 한다.[9]


그는 세 가지의 큰 방안을 언급했지만 사실상 마지막 ‘자유방임’의 방법이 가장 옳다고 옹호하고 있다. 왜냐하면 첫째 방안인 “이 모든 형태의 부를 평등하게” 하는 것은 그가 종합적 결론을 내리기 앞서 ‘이러한 정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자녀의 수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옳지 못한 것이다, 부양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법을 없애야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궁핍해진다’라며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즉 현실성이 없다고 이미 말했던 것이다. 두 번째 방안도 동일하게 앞서 비판한 바 있다. 


“알맞은 한계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 한계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개인의 재산이 많은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규제를 확립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고정적인 양을 모두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 재산보다 욕망을 평준화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법으로 훈련(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결국 그는 마지막 방안 즉,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에 대한 자유권이 현실적이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것이며 에둘러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제까지 팔레아스가 내놓은 정치철학에 관하여 살펴보았으므로 그의 제안들이 좋은지 나쁜지는 각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10]


마지막으로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Rhetoric)』에서 콕 찝어 말하기를, 재화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소유권이라고 말했는데,[11] 이 발언은 토지를 포함하여 사소유권의 절대성, 개인성, 배타성이 4세기 경에 뚜렷히 증대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 두 세기 전의 그리스 조상들의 토지사상으로는 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이 토지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었을 것이나, 시대가 바뀌었고 토지사상도 바뀌었다.


물론 법률가 리시아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몇 사람의 발언 및 주장을 근거로 그리스에서 진행 중이던 토지사유제도로의 이행을 일반화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허나 감히 일반화하여 짐작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확인된다. 첫째로 위 인물들이 1~2세대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기에 변화의 과정을 조금 더 면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둘째로 플라톤은 법률론에서 “내 물건은 누구도 손대지도, 만져서도 안된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추어 보건대 그의 세대에는 이미 재화에 대한 소유권의 절대성이 증가하고 있음이 엿보인다.[12] 


셋째로 예전엔 아테네인들도 토지와 그 외 재화를 뚜렷히 구분하는 재산관을 가지고 그에 따른 법규들을 준수했으나 그 시절은 오롯이 과거가 되어버려 고전기에는 그러한 구분이 사라졌고,[13] 앞서 언급했듯이 후세대로 갈수록 부동산도 동산 등에 흡수되었는 것이 확인된다.[14] 자연스레 동산처럼 토지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이 형성돼가고 있었다. 아들이 있을지라도 토지 처분에 대한 가장의 자율성이 크게 증대된 것도 바로 기원전 4세기였다.[15]


넷째로 그리고 역사적 혼란기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강조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까지 고려하면 당시의 그리스가 확실히 토지사유사상을 이성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이는 ‘변화의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그리스 각 지역이 당시의 패권 강국인 마케도니아로부터 공격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대략 그 시기부터 그리스인들 사이에 현실도피적인 사상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폴리스 안에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를 정의하였던 그리스인들은 탈사회적으로 자신, 자유, 행복을 정의하기 시작했는데 그 종착지가 바로 개인주의였다.[16]


헬레니즘 문화를 열어 젖힌 알렉산더 대왕의 모자이크화.(Alfio Ferlito/Shutterstock.com.)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약자들을 보호하기도 했던 공동체적 정신과 군역토사상은 이젠 수백 년 전에 있었던 과거일 뿐이었다. 마케도니아의 급성장으로 탄생한, 약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년까지의 헬레니즘 시대의 윤리학도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공공정책과 거리가 먼, 개인적인 선택을 강조하고 존중하게 했다.[17]


그 시대에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태동한 스토아사상, 필론사상, 에피쿠로스사상의 교집합에는 ‘인간의 행복은 자유로부터 온다’라는 사고방식이 있었는데[18] 이렇게 촉발된 개인주의, 탈폴리스적 사고, 현실주의가 그 당시 아테네인들이 그토록 숭배하고 절대적으로 여겼던 이성을 뒤흔들었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내부적인 토지사상과 토지제도에도 반영되었다. 위와 같이 토지를 포함한 사유재산제도를 크게 옹호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고로 필자가 추측하는 바는, 알렉산더에게 경제에 관한 교육을 하였다면 필시 그와 그의 나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재산제적 사상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여 보면 앞서 언급했던 4세기 아테네인들의 서약은 갑작스레 토지평등사상을 개혁적, 급진적으로 갑작스레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와 그 방향성을 재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윽고 아테네는 기원전 338년에 마케도니아와 벌였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멸국했다. 멸국 당시 아테네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토지법제사적 관점으로 본 아테네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첫째로 스파르타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역토사상, 상당한 수준의 토지평등사상이 뚜렷이 있었다. 두 번째로 아테네 특유의 경제적 특성, 예속농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해주었던 솔론의 개혁, 토지 취득의 낮은 배타성 등 때문에 이렇다 할만한 토지개혁은 기원전 4세기 말에 멸국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기원전 5세기의 풍요로 인해 토지주권사상 및 토지평등사상이 퇴색하고 결정적으로 토지재분배를 실시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토지평등사상은 크게 퇴색하였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 사상의 명맥을 이어갈 뿐이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국가는 로마이며 본서에서 토지법제사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마가 법으로 서양 세계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토지제도를 고도화시키며, 이를 계승한 유럽이 세계에 로마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에 국한해서는 건국 시점부터 전례 없이 독특한 토지사상과 소유권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에 따른 그 변화가 토지법제사적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보다 더욱 사료가 풍부하여 다각도로 로마인들의 토지법과 그 법을 적용하여 살고 있는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종착지는 극심한 빈부격차다.






아테네의 토지사상의 변천과 그에 따른 몰락의 역사를 (i)~(iii)에 걸쳐 확인하였다.


이들 또한 스파르타인들처럼 자신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올바르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토지사상을 잃어버림에 따라 점차 휘청거렸다.


기원전 5세기 초~중반에 세계 최강국이었던 페르시아 대제국을 무찔렀던 배경에는 옛 토지사상이 있었다.


허나 4세기 말에 마케도니아를 견뎌내지 못했던 배경에는 그 토지사상의 '상실'이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국가는 로마다. 미리 예고하자면 이들의 멸국의 이유 또한 스파르타, 아테네의 멸국의 이유와 완전히 동일하다. 시계바늘을 조금 뒤로 돌려, 기원전 753년으로 가보도록 하자. 





References


[1] Dionysius of Halicarnassus, On Lysias, ⅩXXIV;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177쪽.

[2] Platon, Nomoi, 745c~d.

[3]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874쪽. 원문에서는 Plutarch, Lucullus.

[4] Aristotle/손명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16), 296~297쪽. 원문에선 Politika, 2.5.

[5] 상게서, 321~322쪽. 원문에선 Politika, 2.9.

[6] 상게서, 324쪽. 원문에선 Politika, 2.10.

[7] 상게서, 505쪽. 원문에선 Politika, 7.10.

[8] 상게서, 원문에선 Politika, 2.6.

[9] 상게서, 310쪽. 원문에선 Politika, 2.7.

[10] 상게서, 310쪽. 원문에선 Politika, 2.7.

[11] Harrsion, 전게서, p. 202. 원문은 Rhetorike, 1361a 21.

[12] Platon, Laws, 913a, PERSEUS DIGITAL LIBRARY, accessed Feb 13, 2021,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lat.+laws+11.913a.

[13] Harrision, 전게서, p. 228.

[14] 최자영, 전게서, 449쪽.

[15] Harrson, 전게서, pp. 151~152.

[16] 김진경 외, 전게서, 136~137쪽.

[17] 김진경 외, 전게서, 138쪽.

[18] 김진경 외, 전게서,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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