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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3. 2021

21세기 귀족(13)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건국 배경과 자유관)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3)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건국 배경과 자유관) -



    챕터 4 : 로마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4-1 : 건국부터 카이사르까지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기원전 10세기 경, 테베레 강을 끼고 팔라티누스(Palatinus) 언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설적인 인물 로물루스에 의해 기원전 753년경 그의 이름을 딴 도시국가 가 건국되었으니 바로 로마다. 훗날 기원전 510년에 공화정 국가로 바뀌기 전까지의 로마는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7명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왕정 국가였지만 그것은 껍데기였을 뿐이었다. 사실상 실권은 혈연 중심의 세습귀족(파트리키, patricii)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두정 국가였다. 건국왕인 로물루스가 사망하자 150명의 원로원들이 왕의 업무를 교대로 수행하자고 합의를 내린 적도 있을 정도였다.[1]


오늘날의 테베레 강(Photo : Andreas Tille.)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 귀족이나 시민처럼 그들의 권력에 근간은 ‘전적으로’ 토지였으므로, 권력을 가진 귀족은 반드시 지주였다는 것이다. 특히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535)가 집권하고 나서 국가 경영은 씨족들로부터 재산의 정도에 따라 무장할 수 있는 군대로 옮겨갔는데 그 이후에는, 로마 내의 정치사회적 권력은 순도 99.9%가 토지 소유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허나 앞서 살펴보았던 그리스의 지주들과 로마의 지주들 간에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의 토지 및지주권이 건국 초부터 공권력에 거의 ‘구속되지 않았다’라는 점에 있다. 평범한 규모의 토지가 아닌, 귀족으로써 막대한 토지를 거느린 지주귀족들은 더욱 그러했다. 로마 건국의 시점의 이전부터 로마의 귀족들은 사실상 그 지역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자들이었고 왕, 공권력, 공동체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토지 재산을 운영하는, 독립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었다.[2] 그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국가로부터 벗어난” 존재였던 것이다.[3]


지주귀족들이 국가의 공권력에서 벗어난 만큼 그들이 가진 재산은, 즉 그 토지를 소유함에서 나오는 로마 지주의 지주권은 동시대 주변 문명권에서의 지주의 지주권과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콜랑쥬는 이를 두고 “로마인이 토지 소유자에게 부여한 절대의 힘”이라고 평했을 정도였다.[4]


이러한 평가는 로마가 그리스 문명과 아주 가깝고 닮았음에도, 토지사상만큼은 아주 독립적이면서 그 토지사상의 바탕을 둔 지주권은 아주 강력했음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말이다. 이것이 동시대 주변 문명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 소유권(propritété quiritaire)이 일찍이 성립할 수 있던 배경이었다.


왜 건국 초부터 이러한 명백한 차이를 보일까? 그 단서는 로마 건국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혹자는 설화를 통해 역사를 살피는 것은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롯이 설화를 허구로 이루어진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 탐구를 위한 유용한 도구를 스스로 내던지는 꼴이다. 신화는 대개 당대의 실제 사건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형 로물루스, 동생 레무스는 본래 작은 나라의 왕자들이자 목축을 하던 자들이었다.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아버지의 동생이 왕위를 탈취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분노한 형제는 그 숙부를 죽이고 고향 알바룽가 지역을 ‘떠나서’ 테베레 강 유역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지지자, 그리고 인근의 양치기 및 농민들과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닦는다. 형제는 곧 새 나라의 왕위를 놓고 싸워 두 세력권으로 나눠졌고, 동생 레무스가 세력의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로물루스는 그를 살해하고 로마를 세운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로물루스-레무스 형제(© irisphoto1/Fotolia.)


간략히 정리한 이 내용 중에서 필자는 그들이 숙부를 죽이고 다른 곳으로 ‘떠나서’ 나라를 세웠다는 부분에서 우리의 실마리를 풀 단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건국된 8세기는 그리스 폴리스들이 건국되던 시기와 일치하는데, 언급했듯 당시 그리스 땅의 수많은 실력자들은 이미 자신만의 사유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신화 속 영웅들을 숭배하며 자신들이 토지의 적법한 계승자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토지 소유에 정당성을 제공해주었고 그들은 추가적으로 이를 무력으로 지키려고 주변 실력자들과 폴리스를 형성했다. 헌데 로마를 세운 이들은 그들이 ‘떠나서’ 도착한 땅(테베레 강 유역)의 기존 실력자들이 아니고, 그곳 실력자의 아들들도 아니었다. 완벽히 외래인이었던 것이다. 분명 시원찮은 무력 및 군사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이 세워진 국가인 로마에서 로물루스는 일단 왕토사상을 주장할 수 없었다. 왕토사상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신께서 나를 왕으로 택하셨다. 고로 내게 지배의 권리가 있다’라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해줄 신정(神政)사상이다. 2천년 전부터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해주는 도구를 신에서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5]


적어도 이 주장에 인민들을 강제로 복속시킬 만한 강력한 왕권 및 군사력있어야 한다. 그러나 천 년전 미케네 문명의 지배계층처럼 로물루스는 현지를 다스리던 왕의 아들이 아닌 외래인이기에 왕권을 내세울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오히려 왕토사상의 주장과 그 제도적 구현은 현지 지주들 및 현지 지지자들의 반발을 사서 이제야 첫걸음을 뗀 왕권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득보다 실이 훨씬 큰 모험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왕이 주도하여 토지평등사상에 입각한 제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지주귀족들의 지주권이 아주 강력해지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다만 로마에서는 토지평등사상의 도입 및 제도화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토지평등사상이 로마인들에게도 있어서 향후 몇 세기 동안은 상당히 실효를 발휘했다.


설화를 벗어나 역사적 사실들도 이이 대한 방증이 된다. 첫째로 어원이다. 로마 원로원을 부르는 말이 ‘건국의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이고 귀족을 의미하는 단어 파트리키(patrici)가 이에서 나왔는데, 이 어원을 추적해보면 건국 직후 구성되는 초대 원로원 100명은 갓 건국된 로마를 이루는 가문들의 가장 어른이 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판단된다.[6]


<연설하는 키케로> 키케로와 그를 포함한 원로원 구성원들을 묘사한 19세기 프레스코화(Cesare Maccari.)


이 추론이 옳다면, 그 100명 중 상당수는 마치 폴리스를 세웠던 사람들처럼, 그들도 ‘로마 건국 이전에’ 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 및 실력자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파트리키는 다른 이주민들과는(흔히들 알고 있는 플레브스Plebs라는 용어는 본디 평민이 아니라 이런 이주민들을 의미했음) 달리 혈통이 분명한 자를 구별하여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라는 설이 있는데,[7] 당연히 이주해온 로물루스와 그의 지지자들보다 그들이 혈통이 확실했을 것이며 또한 넉넉한 토지 재산을 예로부터 가지고 있었을 것은 매우 자명하다. 즉슨 그리스인들처럼 왕토사상에서 크게 벗어나 토지사유사상에 뿌리내릴 여지가 매우 충분했던 사람들이었다. 


토지를 가진 시민 중에 시민답게 그들은 건국 후에 거의 모든 고위 관직을 독차지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많은 역사학자들은 건국 초부터 있던,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최고 기관 원로원의 의원들과 우두머리인 집정관(콘술)도 초기 왕정의 장로들 및 대지주들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둘째로 그리스 국가들이나 후에 게르만 왕권과 비교해볼 때 로마 왕정기의 왕권이 지도자급의 귀족들에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는 것이다.[8] 왕정 수립 직후에는 본래적으로 왕의 자리는 세습되지 않고 선거로 왕을 뽑았던 배경, 공화정이 들어서기까지 무려 약 7백 년 간 국가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지 않고 민회와 원로원과 함께 세 가지 지배력으로 나뉘어 나라가 다스려졌던 배경, 공화정보다 상대적으로 국가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왕정에서조차 로마 사회는 귀족 등의 가진 자들의 힘이 왕보다 강력했던 배경은 바로 이에 있다. 또한 로마 2천 년 역사에서 언제나 토지 재산이 거의 없는 빈곤한 인민들이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주귀족 및 원로원의 통치에 복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에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로마 역사 초에 그들은 법을 ‘퀴리테스인들의 법(ius Quiritium)’이라고 불렀는데, 그 퀴리테스인들은 도시 로마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거주하였던 방어공동체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도[9] 또 하나의 방증이다. 로마의 도시화 이전부터 일찍이 존재하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서로 협조겠는가. 필시 그리스인들이 폴리스를 형성했던 목적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재산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고전기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유권와 소유권의 근거를 로마 이전의 바로 그 ‘퀴리테스인들의 법’에서 찾았다.[10]


허면 위와 같은 건국초 역사가 로마인들의 자유관과 재산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단 말인가? 동시대 그리스인들과 비교하면 어떠한 부분들이 다르단 말인가? 먼저 로마적 자유관을 알아보자. 그리스인들은 공익에 기여한 시민으로서 정치적 발언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며 현대적 기준에서는 적극적 자유이다. 로마인에게는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행동이 자유이며 현대적 관점에선 소극적 자유이며, 이는 언급했듯 마치 지주귀족들이 왕권 및 공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그리스인에겐 국방 등의 공익에 참여하며 기여하는 적극적 개념이 ‘적극적 자유권’의 근거가 되는 반면, 로마인들에겐 자연 상태에서 추출한 소극적 개념이 ‘소극적 자유권’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적인 토지사상 위에는 로마적 자유가 성립할 수가 없었고 그 반대도 그러하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것을 마음껏 누리고 차지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참된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로마고전법학으로 이어진다.[11] 즉 로마적 자유란, 언급했듯 외부의 간섭 없이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상태이다.[12] 4세기 말경 활동했던 법학자 플로렌티누스(Florentinus)가 남긴 말은 이를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자유란 힘에 ⋯ 의하여 금지되지 않는 한,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다.[13]


      


지금까지 로마 건국의 물적 배경과, 로마인들의 자유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로마는 건국 시점부터가 왕이 강력한 중앙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토지'에 기반을 둔 현지 강자들이 실권을 쥐었다는 배경과, 자신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허나 단순히 "조금 독특한 나라가 생겨났네"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나라다. 왜냐하면 이 자그마한 나라가 정확히 6백년이 지나 서양사 최강의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자신들만의 절대적/개인적/배타적 토지사상을 중세 유럽 국가들에게 상속시켜 줄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 유럽 국가들은 그 로마적 토지사상을, 근현대에 접어들어 아시아 등 전세계에 재차 상속시켜줄 것이다.


원했든지 아니든지, 당신도 그 로마적 토지사상을 이미 상속받은 사람이다.




Reference


[1]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120쪽. 원문에서는 Plutarch, Numa Pompilius.

[2] 김창성, “플루타르코스의 『코리올라누스』에 나타난 로마 귀족의 권위와 기반”, 「역사교육」136(2015.12), 218~219쪽.

[3] Max Weber, “Agraverhätnisse im Alterteum”, Handwörterbuch der Staatswissenschaft, I-3(Jena: Verlag G. Fischer, 1909), p.146; 김창성, “플루타르코스의 『코리올라누스』에 나타난 로마 귀족의 권위와 기반”, 218쪽에서 재인용.

[4] Fustel de Coulanges/明比達郞 옮김, 『고대프랑스토지제도론 상(上) 』(日本評論社, 1949), 8쪽; 이상태, “로마法에 있어서의 土地⋅建物 간의 法的 構成”, 『일감법학」 (2009), 487쪽에서 재인용.

[5] Robert C. Ellickson & Charles D. Thorland, “Ancient Land Law: Mesopotamia, Egypt, Israel”, 71 Chi.-Kent L. Rev. 321 (1995), p. 360.

[6] 시오노 나나미/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1』(한길사, 1995), 35~36쪽.

[7]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67쪽. 원문에서는 Plutarch, Romulus.

[8]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41쪽.

[9] 성중모, “키케로 법률론의 법론과 법개념”,『법사학연구』(2016), 311~312쪽.

[10] 상게서, 311~312쪽.

[11] 최병조, 『로마法硏究(1)』(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122쪽.

[12] Karl Kroeschell/양창수 옮김, “게르만적 소유권개념의 이론에 대하여”, 「서울대학교 法學」(1990), 225쪽.

[13] 최병조, 전게서,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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