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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3. 2021

21세기 귀족(14)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재산관과 초기 특징)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4)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재산관과 초기 특징) -



다음으로 로마인의 재산관에 대해 알아보자. 2세기경 활동했던 로마 법학자 파울로스(Julius Paulus Prudentissimus)가 남겼던 말에서 그들의 재산관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를 국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물건의 소유권은 자연적 占有[점유]로부터 시작한 것이며, 이러한 사정의 자취가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서 포획되는 것들에 남아있다고 少네르바는 말한다. 즉, 이것들은 즉시 최초로 이것들의 占有[점유]를 취득하는 자들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포획된 것, 바다에서 돌출한 섬, 해변에서 발견된 보석과 진주들은 그것들의 점유를 취득한 자의 것이 된다.[1]


여기에서는 거의 동산에 대하여(“보석과 진주들”) 선점유가 곧 소유권 획득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로마인에겐 재산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거의 없었다는 것과[2] 섬이라는 예시로써 땅에 대해서도 선점유자가 소유권을 취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산과 부동산 양자에 모두 해당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이에서 로마인들은 재산 소유의 공동체에서 찾지 않고 전적으로 개개인의 자연스럽고 의식적인 (점유)행위에서 찾았던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자신의 재산권의 근거를 사적 차원에서 공적 차원으로 확장시키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던 것이다.[3] 결국 그리스에서의 소유개념은 ‘타인보다 더 나은 권리, 타인보다 더 우선되는 권리’였던 것과는 달리, 로마에서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배타적 권리’였다.[4]


이렇게 로마적 자유관과 로마적 재산관, 양자는 서로 독립적 영역일 수가 없었다. 로마적인 자유를 향유하며 로마적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재산이 외부로부터의 구속 아래에 있어서는 불가하다. 반대로 로마의 토지를 향유하며 로마적 자유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자유가 외부로부터의 구속 아래에 있어서는 불가하다. 로마적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로마적 자유가 있는 사람이며, 로마적 자유가 있는 사람은 로마적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양자의 관점으로 로마적 토지사상을 바라보면 그들만의 독특한 토지사상은 또렷이 보인다. 로마적 토지자상이란 ‘자신의 토지에 대해 외부 간섭을 받지 않고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눈치빠른 독자들은 이미 느꼈겠지만,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은 현대의 소유권사상과 거의 동일하다.


그들이 행사하는 지주권과 그 행사는 공동체원들의 동의와 지지에서 나오지 않고 개인 자신으로부터만 나왔다. 특히 그리스 폴리스들과는 달리 언제든지 로마 귀족의 토지는 자의에 따라 자유로운 처분이 크게 가능했다는 점은 가히 로마 소유권사상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이자,[5] 기원전 4세기 전까지는 토지 처분에 큰 제한을 두었던 아네테와 큰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나아가 이러한 점은 게르만법사상과 비교하여 로마법사상이 공유[6] 개념은 있지만 합유[7], 총유[8] 개념이 부재했던 이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개인이 자의대로 처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대 그리스 문명의 토지사상과 비교하자면 절대성, 개인성, 배타성이 매우 높았음은 당연하다. 다만 건국 초에는 그 정도가 덜했음을 언급해두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후술한다.


이를 종합하여 로마적 자유관, 로마적 재산관, 그리고 로마적 토지사상의 관계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위 같이 그들만의 독특한 토지사상 덕에 그들이 소유권 등 법적 권리를 행사하려 할 때 국가 공권력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적, 자율적 차원에서 집행이 가능했었고,[9] 인류의 법제사 최초로 단독소유권개념을 법제화할 수 있었다.[10] 그러한 절대적, 개인적, 배타적 토지 점유가 법으로 보장되는 토지소유권으로 직결되는 위 같은 사고방식은, 후술하겠지만 로마를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토지양극화로 이끌 것이었다.[11] 왜냐하면 지주는 자신의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 또한 그 기원이 공동체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 사적인 권리를 행사하여 모든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 정부들과는 달리 로마 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처럼 로마에서 최고의 재산은 토지였음은 매우 당연하다.


정리하자면 첫째로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소극적 자유에 가까운 로마적 자유관과, 둘째로 외부의 인정이나 동의를 필요치 않고 개인의 의식적 활동으로 물건에 대한 절대적, 개인적,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는 로마적 재산관과, 셋째로 각 지주들의 토지소유권이 국가권력보다 선재(先在)하고 있었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로마만의 토지사상이 건국시기부터 확고하게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건국 초에는 토지가 개인이 아니라 씨족 단체의 재산으로 생각되었다는 걸로 보건대[12] 가보유지사상(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토지를 보유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13] 명확하게 다른 국가 및 문명권에 비해 로마의 토지 제도는 공유지와 사유지의 경계가 매우 뚜렷했다는 사실 하나는 결코 변함없었지만[14] 산림, 방목지, 목초지 등 공유지도 있어 대부분의 인민들은 이를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또한 토지를 넉넉히 가진 부유한 지주귀족들이 고위 관직을 독차지하는 등 정치경제적 권리만을 누린 것이 아니고, 우리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막대한 사회적 의무까지 이행했다는 점에서도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물론 수백년이 지나면서 그 의무를 내던져 버리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지주귀족들과 그 외 인민들은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를 맺었는데(Patronage System), 전자는 후자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변호인이 되어주고, 후자의 딸의 결혼 지참금이 부족할 경우 전자가 일부 부담해주고, 빚을 탕감해주기도 했다.[15] 이러한 (사회적)비용은 농경시대에는 당연히 토지의 지대로부터 나왔고 부유한 지주 이외에는 감당할 수 없는 큰 경제적 소요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특히 확인된다. 결정적으로, 건국 왕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왕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열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사비니족의 처녀들을 납치하여 생겼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토지와 재산을 내놓았던 희생을 근거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16] 이 사건에서 넉넉한 토지 재산을 가진 자가 공익에 기여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당시의 사고방식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를 일목 요연하게 설명하는 유뷰트 영상의 한 장면(https://www.youtube.com/watch?v=rD7Gux8R2DA.) 아쉽게도 국어 자막은 없다.


다만 그리스에서는 개인의 사유지에 대한 사적 이용을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하고 사유지에서 나오는 지대를 일차적으로 사회가 향유하기도 했던 것에 비해서 로마는 그 지대가 일차적으로 일단 지주가 사유재산으로 귀속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보자면 로마의 토지공개념이 덜한 편이라고 판단된다.


비슷한 양상으로, 그리스보다는 덜하지만 로마 건국 초에는 적잖은 수준의 토지평등사상이 확인된다. 훗날 로마가 외부로 팽창하면서 전쟁을 통하여 새로이 획득한 토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인민들에게, 심지어 그들의 가족 수까지 고려하여 평등히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고,[17] 전승에 따르면 그렇게 전리품으로 획득한 토지는 공유지로써 일차적으로 가난한 시민에게 적은 세금을 납부할 것을 약속 받고 분배해주었다고 한다.[18] 또한 로마는 아주 오랫동안, 국가 예산의 거의 전부가 이러한 공유지에 대한 방목세 징수로 창출되었다는 점에서도[19] 토지평등사상 그리고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그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를 모든 시민이 고루 나누어 가진다는 점에서 국가 재정을 풍족히 하는 우수한 정책이자 곧 로마의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었다. 허나, 아테네 등지에서는 토지 소유(량)의 한계를 정해 놓았지만, 로마 정부는 절대 그러한 간섭과 제한을 할 수 없었다는 점만 두고 보자면 상대적으로 토지평등사상은 다른 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심지어 근대 유럽에서 벌어졌던 인클로져의 원시적 현상이 이미 기원전 로마시대에 있어서 로마 지주귀족들은 토지 확장에 눈이 멀어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자신에 토지에 합병시키는 문제가 발생했을 정도인데 물론 로마 정부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이를 막을 힘도, 그렇게 할 의지도 없었을 정도이다.[20]


훗날 정복 전쟁의 전리품으로 획득한 토지는 엄밀히 국유지(ager publicus)임에도 이를 국가로부터 임대한 부유한 지주들이 이를 사실상 사유지로 여기고 세습했던 현상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국유지 임대차 계약에 있어서 임차인에게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댔던 것과 매우 상반된다. 그리스에선 국유지를 임대한 개인이 이를 사유지화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는데 로마에서는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행위가 버젓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현상은 앞서 자세히 살펴본 로마적 토지사상에 대한 선 이해가 없으면 분석이 불가하다. 로마인들의 토지사상으로는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는 외부로부터 간섭이나 제한을 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는 국가로부터 임대한 토지이기에 제도로부터 간섭을 받아야 한다. 사상과 제도는 서로 수 세기 동안 상충되고 맞부딪혔고 이윽고 승자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필시 지주귀족들이 정치사회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배경이 필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훗날에는 막대한 공유지를 사실상 사유화한 지주귀족들이 세금 납부마저도 회피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로마인들의 재산관과, 건국 초 토지사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건국초에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만큼은 아니지만 현대의 부동산제도와 비교해보면 더욱 정의롭고, 더욱 공평하고, 더욱 올바른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허나 이어지는 내용에서 로마인들이 이 토지사상을 조금씩 내던지게 되는 역사가 펼쳐진다.


그 안타까운 부동산제도 역사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아, 물론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References


[1] Nerva/Paulus, 『학설휘찬』. 41.2.1.1 (54 ed.); 최병조, 『로마法硏究(1)』(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123쪽에서 재인용.

[2] 황적인, 『로마法‧西洋法制史』(박영사, 1981), 177쪽.

[3] Okko Behrend, 31f; 최병조, 전게서, 124쪽에서 재인용.

[4] 최자영, 『고대 그리스 법제사』(아카넷, 2007),  465쪽.

[5]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283쪽.

[6] 공유 : 공동 소유의 세 가지 개념 중 하나로써, 타인(들)과 공동으로 소유한 재화에 대해 각자가 일부 지분을 갖고 처분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이 특징으로 인해 개인주의성이 가장 크다. 예를 들면 2인 이상이 받는 상속 재산.

[7] 합유 : 공동 소유의 세 가지 개념 중 하나로써, 타인(들)과 합의된 목적에 따라 재화를 함께 소유하지만 자신의 지분을 처분 및 분할하고자 하는 경우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타인(들)과의 (전원)합의에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조합 재산.

[8] 총유 : 공동 소유의 세 가지 개념 중 하나로써, 위 두 개념과는 달리 각 소유주들은 지분을 나눠 갖진 않지만 단일체로써 향유 및 처분을 결정하며 행사한다. 예를 들면 교회 재산.

[9] Okko Behrend, 33ff; 최병조, 전게서, 124쪽에서 재인용.

[10] 현승종, 전게서, 283쪽.

[11] Jan Stanislaw Lewinski/정동호 외 2인 옮김, 『財産의 祈願과 村落共同體의 形成』(세창출판사, 2007), 71쪽.

[12]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29쪽.

[13] Luigi Capogrossi Colonesi/김창성 옮김, “로마 시와 토지”, 「역사와 역사교육」(2013), 82쪽.

[14] 상게서, 94쪽.

[15]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67쪽. 원문에서는 Plutarch, Romulus.

[16]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119~120쪽. 원문에서는 원문에서는 Plutarch, Numa Pompilius.

[17] Colonesi/김창성 옮김, 전게서, 115~116쪽.

[18] Plutarch, Tiberius Gracchus, 8, 1~3;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208쪽에서 재인용.

[19] 김창성, “로마 공화정기 방목세 징수와 기사신분의 역할”, 「서양고전학연구」(2010.3), 61~63쪽.

[20] Perry Anderson/유재건 & 한정숙 옮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현실문화연구, 2014),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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