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5)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군역토사상과 시민권)-
로마에서 지주귀족들을 제외한 인민들은 작은 땅의 농민들이었다. 그리스에서 그랬듯이, 외국 출신의 로마 거주민은, 이주민 출신으로서 건국 이후 오랫동안 토지를 소유할 권리능력조차 없었다. 이러한 인민들의 부채에 대하여 법의 보호도 시원찮았기에 막대한 빚을 다 못 갚으면 그 작은 땅마저 몰수당하고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그마저도 최초의 성문법이 제정되는 때까지는 불문법으로 다스려져서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에서처럼 귀족의 자의적인 해석이나 변형이 상대적으로 용이했기에 법 해석과 재판 등은 평민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다. 과거 왕정 시기에는 귀족과 인민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주는 기능이 있었으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진입함으로써 귀족의 권력은 더 비대해졌다.
그나마 다행히 군역토사상은 아주 명확했다. 그리스처럼 적어도 건국 초기에는 지주 귀족들이 국방에 기여하는 바는 아주 상당했다. 그리스처럼 토지 취득의 자격은 오직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토지주권사상이 확인되고, 그 시민권자는 반드시 군역을 이행하여야 했다.(이렇게 직접세 납부를 대체했다) 더불어 무장에 소요되는 비용 전액을 각자가 부담했다. 전쟁 소요가 발생하면 모이는 그들은 상비군이 아닌 시민군으로서, 즉 ‘아씨두이(Assidui)’라고 불리는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대제국 로마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보병들은 이러한 아씨두이들이다.
옛 로마군의 갑옷을 입은 현대인들. 한때 서구 세계를 완전히 주름잡았던 위용이 느껴진다.(Giorgio Cosulich / Stringer / Getty Images.)
특히 그 아씨두이라는 말의 뜻은 “토지에 정착한 자”였다는 점에서[1] 군역토사상의 명확한 구속력은 언어학적으로도 방증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토지가 있어 납세 능력이 있는 자들 즉 군역 이행자들은 17세부터 무려 45세까지 현역이었고 46세부터 60세까지 예비역에 해당되었다. 반대로 토지 없는 무산자는 납세할 것이 없는 자들 즉, 군역이 면제된 자들이었다. 이처럼 엄격한 로마 군역토사상은 징병제를 약 기원전 1세기경에 모병제로 바꾸기 전까지 상당한 수준을 이어나갈 것이다.
한편 로마 정부 및 원로원은 군역을 이행하고 제대한 군사들에게 전혀 보상을 해주지 않았었는데, 이 또한 군역토사상의 올바른 반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군사들은 토지 소유라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에 따르는 마땅한 의무를 이행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전적인 희생과 봉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마 시민 = 지주 = 군인’이 된다.
한편 오늘날에 미덕, 올바름을 의미하는 단어 ‘virtue’는, 본래 라틴어 virtue에서 왔는데, 기원전 5세기의 virtue가 의미하는 바는 ‘사내다움, 용기, 무용(武勇), 미덕’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2] 당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용기내어 싸우는 것=올바른 것=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라는 등식이 성립했던 것이다. 토지법제사적 관점으로 이를 분석해보면 싸우는 것은 군인이 하는 것이고, 당시의 군인은 지주이므로 ‘지주가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은 마땅한 것, 올바른 것’이었던 것이다.
다만 기원전 4세기 초부터는 여름에만 한정되어 있던 복무가 연장됨에 따라 동시에 소정의 일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3] 그 금액은 너무 적어서 무산자의 하루 소득보다 낮았기에 속주민이 십일조를 내고 병역 면제받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으나, 이에 대해서 불평하는 로마 시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4] ‘토지소유권을 가진 로마 시민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한다’라는 로마 군역토사상이 건국초와 다음 수세기까지는 매우 엄정했음을 재차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혹자는 토지소유와 시민권의 관계성은 초기 그리스와 거의 동일하기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의 시민권은 토지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소유 여부에 상대적으로 중점이 더 있었고 공직자로의 선출도 추첨으로 이뤄졌었지만, 로마인들의 시민으로서의 지위는 토지의 크기 및 토지재산의 수준에 비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 비소유자, 즉 시민 중에 가난한 자는 군역의 의무나 부담이 없었다. 특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로원 등의 정계 진출을 희망하는 사람은 사실상 전부 대지주들이었고 약 10년 이상의 군복무 경험 또한 필수로 요구되었기에 ‘지주들 중에서 명백히 국가 공익에 기여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진다’라는 사고방식 즉, 토지 소유와 공적 생활(군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군역토사상은 건국 초에 매우 뚜렷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정적으로 로물루스가 건국 직후 편제한 로마군 보병 3천과 기병 3백 명 중에 선출한 백 명의 사람들이 파트리키 즉 원로원이었기 때문에,[5] 지주가 가장 앞서 군역(공익 기여)을 이행해야 권력을 쥘 수 있었다는 사고방식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또한 그리스와 비슷했던 점은, 공동체 구성원 중 소유 재산이 거의 없는 사람은 자유권과 재산권 중 후자를 온전히 주장하거나 행사할 수 없어서 국가의 형성과 유지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또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부류의 시민이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그러한 재산의 필수요소이자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바로 토지였으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시민만이 경제사회적으로 떳떳했다.
건국 초의 로마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등식으로는 그리스와 동일하게 ‘시민=지주=군역인=참정권자’이다.
허나 그리스인들과 비교하였을 때 로마인들의 군역 이행의 동기는 전혀 달랐다. 로마의 지주귀족들의 군역토사상의 이행은 국가공동체나 경제사회적 약자를 위함은 전혀 아니었고, 철저히 자신들의 씨족, 가문의 이익을 위함이었다.[6]
이 같은 맥락에서 토지 소유와 관련이 깊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서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 ‘코리올라누스’편의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는 5세기 로마 전설 속 장군인데, 그의 일생 이야기는 로마인들은 정복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자신의 권위 확장과 동일시 여겼음을 강력하게 방증해준다.[7] 더불어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권위(authority)를 의미하는데 본래 이 단어는 ‘넓히다’라는 뜻을 가진 ‘아우게레(augere)’에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점에서, 로마인으로서 누리는 권리와 권력의 크기는 자신이 차지하는 토지 크기에 비례했음을 알 수 있다.[8]
코리올라누스 장군을 그린 18세기 그림(Giovanni Battista Tiepolo.)
귀족 가문의 명성의 정도, 그 가문이 보유한 토지 크기의 정도, 그 가문이 배출한 인물이 가지는 권력의 정도는 토지 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토지가 아니면 이와 같은 것들은 세워질 수 없었다. 앞서 언급했고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귀족 및 기득권 계층이 먼저 나서서 싸운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재산의 보전을 위함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 토지 재산을 유지해야 지배 계층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적이나 의도가 사익을 위함이든 공익을 위함이든, 어쨌거나 공화정 초기의 로마 시민권자들은 지주로서 토지 소유에 따른 군역을 이행하였던 것이다. 허나 후술되는 내용에서 곧 그 변질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고대 로마에서의 토지와 군역의 관계, 토지와 시민권의 관계, 토지와 권력의 비례관계를 살펴보았다.
명백하게 로마인들도 초기에는 '토지를 가진 자는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었다. 그게 지극히 정상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