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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4. 2021

21세기 귀족(16)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6~5세기)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6)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6~5세기) -


기원전 6세기


7대 왕 타르퀴니우스가 참주적 통치를 했다는 것, 또 그의 아들이 타 귀족의 아내를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귀족들에게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최초로 왕이 없는 공화정국가를 세우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로마 왕정기 7대 왕,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Guillaume Rouillé.)


한 명에게 정치권력이 집중되지 않으니 그나마 민주주의에 가까운 나라가 되어 평등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으로는 아테네의 민주정처럼 민중의 뜻에 따라서 국가가 다스려진 것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들은 더욱 배제되고 지주귀족들을 대표하는 원로원이 실권을 가진 과두정이었다. 16개의 선거구 즉 트리부스의 각 이름들은 귀족 씨족의 이름들에서 그대로 따왔을 정도였다. 경제사회적으로는 토지 점유의 대부분은 세습 귀족들의 특권이었고, 영세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대여해주고 계속적인 불로소득을 얻으며 귀족의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들은 그리스 시민들처럼 토지소유 덕에, 소작농에게 토지를 임대해주고 나오는 소득으로 자신은 생계 유지에 필요한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는 자유(권)를 향유했던 것이다.


주지하듯 그들의 힘과 지배력의 근간은 재산, 더 좁게는 토지였다. 로마 제국은 철저히 그러한 재력자, 지주들의 손으로 경영되는 국가였다. 당연히 원로원 등의 관료직은 오직 두 가지, ‘광대한 토지’와 정치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 당연히 공화정 초부터의 모든 관료직은 과거 왕정기부터 이를 독식하고 있었던 귀족들이고, 시대는 변해도 공직에 입문하기 위한 준비물은 변함없이 토지 재산이었다.[2]


게다가 ‘100인 회의(센츄리아 혹은 켄투리아 민회)’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백인대(百人隊, 로마 군사 100명이 모인 단위)는 193개였는데, 무려 절반 이상이 재력 있는 귀족들로 구성된 백인대였다.[3] 앞으로 계속 언급될 로마사의 인물들의 절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다. 화폐가 발달하여 동산의 성격을 지닌 재산들의 비중이 커져갔으나 토지 소유에 따르는 정치력 영향력이 줄어든 적은 동로마가 1453년에 멸망하기까지의 2천년이 넘는 로마 역사상 거의 없었다. 로마는 멸망할 때까지 지주귀족들의 국가였던 것이다.


국어로 '백인대'라는 제목을 가지고 개봉한 헐리웃 영화 <센츄리온>(Warner Bros. 2010.)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6세기의 세르비우스 왕 시대에 처음으로 조직되고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정립되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그 센츄리아 민회에서 토지 소유와 정치권력의 비례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로마의 민회는 철저히 군을 기반을 하고 있었는데 4개의 민회 중 센츄리아 민회에 속하는 보병을 5계급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토지 규모였고, 이 민회 출신으로서 상위 혹은 하위 공직으로의 진출을 결정하는 제 1의 요소도 물론 토지였다. 


241년에 대대적인 개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이 가장 많은 높은 등급의 시민들이 우선적으로 투표를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1~2등급 시민의 수가 과반(96.5명)을 넘었기에 그들 대지주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센츄리아 민회에서 최하위 등급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투표한 적이 없을 정도다.[4]


당연히 애당초 그 민회에 입회하려면 군인이어야 하고, 군인이고자 한다면 시민이어야 하고, 시민이고자 하면 무릇 지주이어야 했다. 로마에서 토지는 곧 권력이며 거의 동의어였다. 결국 토지와 로마 시민의 관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평하자면, 토지 소유가 클수록 더욱 시민다운 시민이었고, 그 토지 재산을 통해 다른 이들의 시민권 위에 자신의 시민권이 우선하여 정치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명백하게 형식적인 평등만 갖춘 로마 사회가 실질적인 불평등으로 나아갈 여지를 마련해주었고 특히 미래에 심화될 토지양극화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특히 공화정기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콘술, consul)은 언제나 보유 자산이 최상위 2%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배출되었고, 공화정 설립부터 기원전 133년까지 집정관에 선출된 위인들의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고작 10개 가문에서 배출되었다.[5] 반대로 동일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많은 인민들은 변변찮은 땅뙈기의 지주이기에 사실상 참정권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이로써 고대 로마 사회에서의 거대한 토지 소유가 정치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훗날 이는 명백하게 형식적인 평등만 갖춘 로마 사회가 실질적인 불평등으로 나아갈 여지를 마련해주었고 특히 미래에 심화될 토지양극화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산을 기준으로 그 등급에 속했던 만큼 전쟁세와 군역에서 면제받은 자들이 일부 있었다는 것이다.[6] 즉 토지 없는 극빈자들은 군역을 면제 받았다는 점에서 명백히 ‘군역토사상이나마’ 여전히 올바르게 실효를 발휘하였음이 확인된다. 더불어 이는 앞서 확인한 바, 아테네의 솔론의 개혁으로 시민이 4등급으로 나뉘어 부의 수준에 따라 군역 이행의 수준을 달리 했던 것과 재산이 넉넉한 자들은 무기 소지와 군사 훈련 참여에 대한 의무가 있었던 것에 맥을 같이 한다. 허나 로마 또한 시간이 흐르며 곧 변질될 것이다.


당시의 로마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대부분의 가난한 민중들에겐 참정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는 점은 공화정을 설립하는 시기를 즈음하여 제국을 이루는 계층 중 플레브스 등의 민중이 인구의 절반을 넘어갔고 토지가 없어도 시민이라면 전투력의 일부를 담당하는 국가였기 때문에(특히 로마의 팽창기에), 지배 계층도 하층민의 목소리와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민중의 목소리와 고충을 대변하는 관직 ‘호민관’이 기원전 494년에 정식으로 생겼다.



기원전 5세기


언급했듯이 그나마 건국 초에는 토지에 대해 개인의 사소유권으로 인정되지 않고 씨족의 여러 구성권들이 함께 누리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7] 그것마저도 시간이 흘러 약 5세기경부터는 동산뿐만 아니라 부동산까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동시대 타국과 비교해보면 꽤 이른 시기에 파격적으로 단독적⋅자율적 소유권이 확립되었다.[8] 공화정 초기부터 귀족과 인민들의 재산 격차가 현저히 벌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들이 공익에 기여하는 바가 적어졌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9]


가난한 이들은 지주귀족들에게 불만을 가지며 자신들의 신세에 대해 한탄하길 “귀족들의 참혹한 압박 때문에 로마시에서 쫓겨났으며, (중략) 로마는 자신들에게 귀족들을 위해 싸우고 다치고 죽을 권리밖에는 준 것이 없다”라고 했다.[10]


헌데 여기서 “귀족들의 참혹한 압박 때문에 로마시에서 쫓겨났으며”라는 문구가 특별히 흥미롭다.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중요시 여기는 로마 소유권사상으로는 단지 신분이나 재산의 차이를 빌미 삼아 빈자들을 로마 밖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에는 주장이 약하다. 분명 채무불이행 등을 빌미로 삼아 빈자들의 주택 및 토지를 빼앗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지주귀족들이 로마巿 내의 부동산을 특히 욕심내었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 정황이다. 확신컨대 로마巿 내의 부동산과 그 외 근교의 부동산의 지가 차이가 상당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지주귀족들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종의 시세차익 등을 욕심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위와 같이 빈부격차의 증가에 따라 인민들은 지주귀족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고 억압을 받았으며, 그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던 무공 있는 사람일지라도 기한 내에 빚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11] 이렇게 로마는 주변 문명권보다는 일찍이 인권보다 재산권이 앞서는 시대, 국가의 수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큰 경제적 가치를 갖는 시대를 맞이했다. 토지공개념의 퇴색도 다른 그리스 국가들에 비해서 훨씬 빨랐음은 물론이다.






이번 글에서는 기원전 6~5세기의 로마가 '토지 귀족들의 국가였다'라는 것과, 나머지 평범하고 가난한 인민들은 아주 변변찮은 정치력,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로마적 토지사상과 그것이 반영된 사회상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약해지지 않을 예정이다.


가난한 인민들의 재산을 탐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2500년 전 로마 귀족들은 "많은 부동산을 가진 만큼 공익을 위한 기여를 많이 해야 한다(군역토사상)"라는 사고방식만큼은 여전히 명확히 갖고 있었다.


그 사고방식마저도 오늘날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References


[1]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83쪽.

[2] Simon Baker/김병화 옮김, 『로마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8.), 40~41쪽.

[3] 상게서, 43쪽.

[4]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352쪽.

[5] Baker/김병화 옮김, 전게서, 41쪽, 54쪽.

[6] Dinoysius of Halicarnassus, Rhōmaïkḕ Arkhaiología 4, 21, 2; 허승일, 전게서, 299쪽에서 재인용.

[7] Kaser/윤철홍 옮김, 전게서, 29쪽.

[8] 김창성, “플루타르코스의 『코리올라누스』에 나타난 로마 귀족의 권위와 기반”, 「역사교육」136(2015.12), 211~212쪽.

[9] Paul Veyne, Bread and Circuses: Historical Sociology and Political Pluralism, abridged and translated by Brian Pearson(London: Penguin, 1976), pp. 203~232; 김창성, 전게서, 207쪽에서 재인용.

[10]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350쪽. 원문은 Plutarch, Coriolanus.

[11] 상게서, 349쪽. 원문은 Plutarch, Coriol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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