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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5. 2021

21세기 귀족(18)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4세기. 베이이 공성전과 <리키니우스법>)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8)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4세기. 베이이 공성전과 <리키니우스법>)


기원전 4세기


기원전 4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군역토사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건들이 발생했다. 팽창기 초의 로마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장기간의 전쟁인, 기원전 406년부터 398년까지 거의 10년 간 이어진 베이이(Veii) 공성전 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첫째로 흥미로운 부분은, 그 장기전은 아씨두이들의 불만과 경제적 불안을 자아냈고 이윽고 원로원은 전쟁 기간 동안만 직접세이자 전쟁세 개념의 트리부툼(tributum)을 징수하여 봉급 등의 군비를 충당하기로 파격적인 결정을 내려 아씨두이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는 점이다.[1]


16세기말 그림 <베이이 공성전Battle against the inhabitants of Veii and Fidenae>(Cesari, Giuseppe.)


이 트리부툼이라는 세금은, 기원전 406년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167년에 중단될 때까지, 각 시민이 자신의 재산에 비례하여 내는 것이었고 전리품이 상당하여 돌려 받기도 하였다.[2] 즉, 더 많은 토지 재산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전쟁 부담을 지는 군역토사상적 세금이었다. 당시의 재산은 거의 모두 토지였기에,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군역토사상이 명백히 드러난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부분은, 그 베이이 공성전 중에는 당시의 감찰관이었던 카밀루스가 국방 강화를 위하여 젊은 미혼남을 설득하는 동시에 위협하여 전쟁 과부들과 결혼시켰던 사건이[3] 있다는 점이다. 이는 토지법제사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매우 커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강제 결혼 및 재혼의 목적은 필시 남편의 사망으로 그의 토지를 상속 받은 여성들은 이후 세금(직접세인 병역)을 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특히 토지가 없는 미혼 남성이 그 토지를 가진 과부와 결혼하면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가산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의 부동산도 소유하게 되니 군역토사상에 따라 전투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토지를 가진 자는 반드시 공익(전쟁 참가 등)에 기여해야 한다는 군역토사상이 재차 명백히 드러난다.  


한편 “위협하여”[4]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당시의 미혼 남성들은 그 강제 결혼에 크게 반대하고 저항했음이 짐작되는데 당연히 그 결혼을 통해 지주가 되면 베이이 전장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서 확인되는 또다른 것은 토지가 없는 병역 면제자들에게 ‘토지를 준 다음에’ 징병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남아 있던 것이다. 물론 후에는 토지를 주지도 않고 병역 면제자들에게 병역을 부과하는 역사가 벌어질 것이다.


공성전이 승리로 끝나고 기원전 367년에는 그 유명한 농지법,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leges Licinae Sextiae)’이 제정되었다. 이 농지법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칸슐러 트리뷴이란 직책이 사라지고 다시 매년 두 명의 콘술을 선출하는데 그 중 한 명은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것이다. 허나 그 인민 또한 최상위 2%에 속하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세습귀족적 배경의 사람이었기에[5] 토지 재산의 수준에 따라 정치력이 좌우되던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민 두 명이 두 집정관 직책 모두를 취하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거의 두 세기가 지난 173년에서야 이뤄질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도 전쟁으로 얻은 토지 즉 공유지를 500유게라(약 125헥타르, 약 37만 평) 이상 소유할 수 없으며 또 100마리 이상의 소를 방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민이 집정관을 한다는 내용보다 공유지 소유를 제한한다는 점이 로마인들에게 더욱 파격적이었기에 이 법은 일명 ‘농지소유제한법’이라고 불렸다. 방목 제한도 공유지에서 창출되는 목초 등을 소수의 부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제한했다는 점에서 토지공개념, 토지평등사상이 상당히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물론 이 법 이전에도 가난한 로마 시민은 그러한 공유지에서, 가족을 겨우 먹여 살릴 만한 2유게라를 할당받아 왔으므로 토지공개념, 토지평등사상은 명백히 이어져 왔지만 말이다. 


어쨌든 전쟁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으로써의 토지는, 공유지로써 본래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평등히 나눠야 되고 건국초에는 실제로 그랬으나, 고작 한 세기만에 소수 지주귀족들의 손아귀로만 들어가는 토지양극화 문제가 발생했고 이 법은 그에 대한 조치라는 성격도 띈다. 


지주귀족들이 크게 반대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법이 통과됨으로써 그동안 공유지에 대해서 작은 부분만 소유했었던 인민들에게도 정치적, 사회경제적 지위에 있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 같았다. 허나 여기에서 포기할 지주귀족들이 아니었다. 위 법은 최소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상당한 구속력과 실효를 발휘했으나[6] 곧 그들은 법의 허점을 틈타 ‘차명’을 사용하여 합법적으로 이 법의 농지소유제한을 피해가는 묘수를 취했다. 지극히도 로마법제가 문자주의⋅형식주의에 치우쳐 있는 점을 악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로마의 토지공개념이 크게 흔들리고 퇴색했다. 이러한 그들의 문자주의는 3세기 초에 활동했던 로마 법학자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가 이전 세대의 법학자 켈수스의 말을 인용하며 했던 발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법이란 선과 형평의 기술인 것이다ius est ars boni et aequi[7]


이와 같이 법이란 로마인에게 도구이자 기술, 즉 ‘제작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자유로이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리스인들은 법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신본주의적 법사상을 가졌지만[8] 로마인은 상대적으로 인본주의적 법사상에 매우 가까웠다. 그렇기에 크게는 로마의 역사, 좁게는 로마인들의 법 생활이 그 제정자가 누구이고 그 제정자가 어떤 법을 다루느냐,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당연히 토지법 또한 이러한 문제점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까지 이러한 문자주의가 이어졌다.[9]


이런 법사상은 지배 계층의 토지 독점과 그 합법화, 법적 근거 제공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의 로마법에서도 이를 확인할 것이다.


한편 아테네보다는 약 250년 정도 늦은 기원전 326년에 포이텔리우스법(lex Poetelia Papiria)이 제정됨에 따라 인신의 담보가 금지되었으나 로마 사회에서 가장 경제적 가치가 있는 토지가 담보물이 되었으므로 합법적으로 토지가 박탈되는 현실은 그다지 변함없었다. 즉 인신예속은 금했으나 토지양극화로 인한 경제사회적 예속은 합법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가 박탈되면 소작인이 되고, 소작인은 사실상 다른 직업 선택지가 없으므로 해당 토지의 주인에게 종속되어, 인신의 담보에 준하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에서 토지 없는 자는 소작인이 되고, 그 소작인은 농노가 되고, 농노는 사실상 노예와 같은 사회적 지위로 추락하기까지는, 안타깝게도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기원전 4세기의 로마를 살펴보았다.


(1)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공적 부담을 맡겼고,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런 부담을 맡기려면 "억지로라도 부동산을 준 후에야" 맡겼음을 확인했다.

: 왜 현금을 주지 않고 부동산을 주었을까? 부동산 소유와 공적 부담은 같이 따라가는 것이라는 '(군)역토사상'은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 현금 등 동산에 관련해서만큼은 전혀 공개념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토지 관련된 것만큼은 공개념을 철저히 적용했음을 확인했다 : 왜 현금 등에는 간섭/개입하지 않고 오직 부동산 관련해서만 간섭/개입했을까? 부동산은 국가공동체원 전체의 공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토지공개념'이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 위 두 가지 토지사상은 근현대에 들어와 깨끗이 사라졌단 말인가? 통탄스럽도다.

이 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통탄할래야 할 수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부동산 기득권층은 이 역사가 알려지지 않길 바랄 것이다.



다음으론 기원전 3세기의 로마를 살펴보도록 한다.



References


[1]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398~400쪽.

[2] 전게서, 401~406쪽.

[3]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 217쪽. 원문은 Plutarch, Camilllus.

[4] 상게서, 같은 쪽.

[5]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73쪽; Baker/김병화 옮김, 전게서, 41쪽.

[6] 허승일, 전게서, 63쪽.

[7] Domitius Ulpianus, Digesta 1.1.1. pr(1 inst); 최병조, 『로마法硏究(1)』(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118쪽에서 재인용.

[8] Platon, Nomoi, 634e.

[9] 최병조, 전게서,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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